신의 노여움>이 오직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의하여, 말하자면 그의
피로써 풀렸다는 교회의 교리를 나는 도대체 납득할 수가 없다. 신이
그와 같은 분노를 우리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다면, 이 구세주를 결코 보내시지
않았을 테니까. 신이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 자체에 이미 죄의 사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급히 고난을 당하고,
그리고 죽어야만 했을 뿐 아니라, 그 전에 생활을 하시어, 사두개인의 현세적
신앙과 바리새인의 교회 주의로는 행할 수 없는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또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를 가르쳐야만 했다. 이 점을, 즉 이러한 생활을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며, 또 동시에 우리가 져야 할 고난과 시련의
몫을 인내로써 받아들여, 그를 따라서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 주님의 생애가 그러했으며, 또 인간 생활의 온갖 때와 장소에
있어서 진정 그러해야 할, 이와 같은 모범적 생애도, 그와 같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종막이 없었더라면,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교리론이 아니라도 건전한 상식과 심리학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 최대의 행위를 하고, 최대의 고난에 견디어야만 했던 것은,
우리가 부닥뜨리는 훨씬 작은 일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행하고 또 견딜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를 가르치고 또 실행케 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의 힘 외에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고난이나 죽음을 극복케 하신 그리스도의 힘과 약속이 주어져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한층 손쉽게 이룩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의 죽음이 저절로
우리를 정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례의 물과 마찬가지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희생을 감사로써 받아들일 것,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우리를 정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