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8월 17일

별관신사 2014. 8. 24. 05:08

<히브리서4:9>에 대하여.(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소란스러운, 전반적으로 차분함이 없는 시대에도
그와 같은 사람(신의 백성)에게는 항상 안식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일하거나 임무에 종사하도록 정해져 있을 때는 안식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때아닌 휴식을 바라거나 하면 도리어 마음의 평안을 잃을 뿐
아니라 때로는 최고, 최선의 일을 태만히 하게 된다. 누가복음 22:46(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
무릇 안식은 신으로부터 선사 받은 것이어야만 한다. 당신이 마음대로
안식을 취해서는 안 된다. 노년에 있어서도, 그리고 병을 앓을 때도 그러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해져 있고, 대체로 오늘날에는 누구에게나 허용되어
있는 휴식, 즉 자정 전부터의 수면과 일요일을 통해서 이용하도록 하라.
이것은 충분한 휴양을 얻는데 매우 도움이 되며, 게다가 신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렇지 않고 너무 지나치게 쉬거나 편하게 하는 것도 지나치게
일하거나 조급히 구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여가 시간>이나 <휴가>도 무슨 무익한 짓이나, 해로운 짓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심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일생은 그 대부분을 아주 헛되게 보내기에는 너무도 짧다, 알뜰한
목적도 뜻도 없는 즐김, 더더구나 나쁜 결과마저 수반되는 그런 즐김은

즐김이라고 할 수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딱 잘라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가란 뭔가 유익한 것을 하기 위한 시간이다.] 동포교회 찬미가 688번.
마가복음 9:14-29. 간질에 걸린 애의 아버지가 그 무렵 막 일어나고 있던

기독교(이 가르침은 뒤에서 언급하는 이유에서 제자들의 전도로는 그의
아버지의 마음을 별로 강하게 때리지 못했다)에 대한 처음의 불신을 극복한
뒤에 마지막에 한 말(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은

본정신으로 그렇게 말하고자 생각한다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조차도 말하고 싶지 않다면 도저히 구원할 도리가 없다. 반대로
이 근소한 신앙이라도 있기만 하면, 신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제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또 현대의 많은 설교자들-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이루는 바가 없으며, 게다가 그 책임을 <시대의 믿음 없는
정신>이나 <사회주의>나 그밖의 온갖 것에 미룬다-에게 대해서도, 주는

그들에게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가를 확실히 이르고 계신다. 끊임없는
신과의 교제(다만 때때로가 아니다), 모든 향락과 온갖 종류의 이기주의의
완전한 단념, 이것이 곧 그 당시나 마찬가지로 현대에 있어서도 우리들

안에서 작용하는 의식되지 않는 신의 힘이다. 이것을 성직자들은 정녕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안 된다면 그들의 온갖 활동은 무익하다.
<이 세상의 임금(사탄)> 은 아직도 그들을 조롱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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