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人之所畏, 不可不畏.
荒兮其未央哉!
이른바 세속적인 학문을 끊어버리면 근심걱정도
없을 것이다. <속세의 예법으로 까다롭게 따지는> [네]나 [예]하는
대답에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느냐?
<또 인간들의 주관에서 나온 상대적 관념인> 선과
악이 얼마나 틀리겠느냐? <그러한 자질구레한 세속적인 차이는 초월하고 무시
해라! 그러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형벌이나 살육은> 역시 두려
워해야 한다! 속세의 학문이란 가없이 막연하고 걷잡을 수 없이
황당무계한 것이니라.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兒之未孩.
??兮,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세속적인 중인(衆人)들은 마치 풍성한 잔치상을
받은듯, 또는 봄에 높은 대에 올라가 사방을 전망하듯
즐거운양 들떠 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은 담담하고 염정하여 아무런 징조도
없으며 마치 웃음조차 모르는 어린 젖먹이 같다.
맥없이 풀죽은 모습은 마치 돌아갈 곳도 없는 듯하다.
중인들은 모두 넉넉하고 남음이 있으나 나 혼자만은
궁핍한 듯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인듯 혼돈하기만 하다!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兮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且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속인들은 영특하고 빛나지만 오직 나는 어둡고 흐리다.
속인들은 명석하게 분석하지만 오직 나는 혼돈속에 얼버무린다.
[나는 바다같이 깊고 조용하고, 끝없이 표일하게 바람을 타고 난다.]
중인들은 모두 유능하지만 오직 나만은 우둔하고 촌티가 난다.
나만이 남과 달리 <만물을 키우는 젖엄마인 대도 (大道)를 높인다.>
해설.
첫귀절은
<세속적인 학문을 끊어버리면 근심걱정도 없을 것
이다>에서 <속세의 학문이란 가없이 막연하고 걷잡
을 수 없이 황당무계한 것이니라!>까지다. 노자는
속세에서 높이는 학문을 집어치워야 근심걱정이 없
을 거라고 했다. 인간들이 쥐뿔만한 학문지식을 내
걸고 아는 척하거나, 또는 자기의 주장이나 생각이
옳다고 하여 남에게도 따르기를 강요하는 수작은 결
국은 우주의 대도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가없으며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도에
비하면 인간의 지식은 너무나 미미하고 의지할 바가
못된다. 그렇거늘 미소하고 편파적인 지식을 내걸고
온 세계와 온 누리를 자의(恣意)로 다스리겠다고 오만
함으로써 인간사회는 환난투성이가 되고 만다. 노자
는 [네!]라고 대답하거나 [예!]라고 하거나 무엇이
틀린다고 야단법석을 하고 예의다 범절이다 하고
사람을 볶아대고 구속하여 제물로 자라는 길을 막느냐?
또 세속에서 따지는 선악도 마찬가지다. 그런
인위적 가치기준을 버리고 무위자연을 따라라!
학문이나 지혜나, 자의적 가치기준이나 판단을 다
버려라! 그러나 오직 두려워할 것이 있다. 그것은
속세에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즉 형벌을 받고 살육
되는 것이다. 죽음만은 두려워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위나 허무, 염정(恬靜)을 주장하는
노자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라고 했는가를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무위자연의 도는 만물을 스스로 있고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순환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학문이나 주장, 또는 정치나 윤리도덕 같은 것은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조작으로써 남을 구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버리라고 한 것이다. 즉 노자의
<세속적인 학문을 끊어버리면 근심걱정도 없을
것이다>는 영원한 삶과 실존을 위해 현세적이고 가식
적인 인간의 꾸밈과 제약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둘째번의 구절은 <세속적인 중인(衆人)들은 들떠있다>
에서 <혼돈하기만 하다>까지다. 모든 사람이 잘난 척하고
현세적 성과에 자만하고 있으나, 도를 터득한 나는 웃음
조차 모르는 영아같이 무지, 무욕, 무위하며, 혼돈한
속에 어리석게 처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특히
노자는 중인과 나를 대립 시켰다. 이에 대해
후꾸나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유명사를 쓰지 않음으로써 노자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원 보편적 진리, 현상적인 것보다는
근원적인 것, 인격적인 것보다는 원리적인 것을
상징하고자 했듯이 <나>라는 1인칭을 가지고
노자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 앞에 혼자 서
있고 혼자만 도를 체득한 각성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상징한 것이리라. <도가 이름이 없듯이
각성한 나도 이름이 없다.> <노자의 나는
어디까지나 도와 대화를 하는 나다. 세속과
대화하는 내가 아니다.>]
즉 노자는 이른바 쥐뿔만한 지식이나 과학기술이나
잔꾀를 부려 문명사회다 문화다 하고 의기양양하고
좋아하는 중속(衆俗)들 앞에 도를 체득하고 혼돈과
어둠에 혼연일체가 된 나를 내놓고 문명사회를
조소하고 있다. 제3의 구절은 <속인들은 영특하고
빛나지만>에서 <만물을 키우는 젖엄마인 대도(幽道)를
높인다>까지다. 여기서는 속인과 나를 대비시켰다.
속인들은 영악한 척, 유능한 척하고 전체와 영원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토막을 내고 분석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도를 터득한 나는 전체와
영원과 일체가 되어 자타(自他)의 구별없이 오직
만물을 키워주는 대로를 높이고 있다고 했다.
대로를 젖엄마라고 한 뜻을 다시 깊이 음미해야하겠다.
노자의 철학은 절대로 은퇴적이고 퇴영적인 것이
아니다. 순간적인 작은 재주를 버리고 큰 삶과 영원한
실존에 복귀하자는 것이다. 특히 제20장의 뜻을
가지고 현대문명을 비판하면 재미있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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