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구부러지면 도리어 온전할 수가 있고,
굽으면 도리어 곧게 뻗을 수가 있고,
움푹 패어지면 도리어 찰 수가 있고,
낡으면 도리어 새롭게 될 수가 있고,
적으면 도리어 많이 얻을 수가 있고,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인 도를 지킴으로써 천하의
규범이 된다.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성인은> 스스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도리어 밝게 보이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밝게 빛나고,
자기의 공을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공이 두드러지고,
자기의 능력을 자만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오래 갈 수가 있다.
夫惟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성인은> 오직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그와 대적할 아무것도 없게 마련이다.
古之所謂曲則全者,豈虛言哉!
誠全而歸之.
옛사람이 [구부러지면 온전하다]고 한 말이 어찌 거짓이랴!
참으로 <그래야 비로소> 온전하게 도에 복귀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겸양(謙讓)해야 온전할 수가 있고
따라서 도에 복귀하고, 도와 합일할 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제1단에서 [구부러지다(曲), 굽히다(枉), 움푹패이다(窪),
낡아 떨어지다(?)]라고 한 <곡왕와폐(曲枉窪?)>는 겸허(謙虛),
양보(讓步), 무용(無用), 부족(不足), 은퇴(隱退)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들<곡왕와폐>는 도리어 <전직영신(全直盈新)>
의 전제이고 바탕이 된다는 역설적인 철리를 밝혔다.
노자의 철학은 최고의 정점이나 충만에서 시작하지 않고
언제나 밑의 골짜기와 허무에서 시작한다.
밑에서 시작하면 올라갈 수가 있고, 허무에서 시작하면
차츰 찰 수가 있다. 반대로 최고의 정점이나 충만에서
시작하면 더 올라갈 데가 없고, 또 더 찰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오직 아래로 떨어지고, 찾던 것이
감소되고 휴흠(虧欠)하는 길밖에는 없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노자의 철학은 허무와 밑바닥에서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높이 오르고 가득 차려는
생동과 향상과 충만을 의욕하고 지향한 것이다.
무에서 유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절대로
유에 머무르고자 하지 않는다. 유는 유한하다.
유한한 존재는 언젠가는 멸하고 없어진다.
없어지는 것에는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가 없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무다.
또 무는 모든 유의 근원이고 시초다.
따라서 무는 바로 만물의 근원인 도이자, 하나인 일(一)이다.
이에 노자는 [성인은 하나를 지키고 천하의 규범이 된다]고했다.
노자의 철학은 유보다는 무, 갖는 것보다는 안 갖는 것,
적극보다는 소극,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뒤에 처지는 것,
싸워 이기는 것보다는 안 싸우거나 패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주의나 멸망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것을 얻고, 영원한 승리자의 자리에 군림하자는 대범한
배짱의 소산이다. 동시에 순간적 실존에 불과한 인간을
영원한 실재와 일치시키자는 집요한 자기 주장이기도 하며,
인간적으로나 현세적으로나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가능케 하자는 불요불굴의 시도, 대담하고
터무니없는 시도이기도 하다.
밟히고 짓밟혀도 죽지 않는 잡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불사신(不死身)적 위대성과 대범, 그것이 노자의 사상이다.
이러한 불사신,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어디서나 살고 활동하고 만물의 생육화성을
주재하는 원천이 바로 도이다. 따라서 우리가 도에
일치하고 도에 복귀하려면 한마디로 [曲則全]하는
겸양의 자세를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