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과학의 이러한 모든 활동에는 생명의

별관신사 2014. 2. 15. 08:18

과학의 이러한 모든 활동에는 생명의 모든 현상을 연구하려는 염원보다
그 근본적 독단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끊임없는 염려가 더 많이
보인다. 무기물(無機物)로부터 유기물(有機物)의 발생을 설명하고,

유기체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정신 활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얼마나
많은 힘이 낭비되고 있는 것일까?
무기물은 유기물로 변화하지 않는다. 바다 밑바닥을 찾아 보라.

우리들은 거기에서도 핵이라고 부르는, 원생동물을 찾아볼 것이 아닌가!
거기에도 그러한 변화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들은 그것이 발견될
것을 믿어 마지않는다. 하물며 몇 세기의 무한한 세월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 우리들의 신념으로서는 있어야할 것인데도 현실에는 없는 모든
것으로서 거기에 떠맡길 수 있음에 있어서랴.
유기적 활동에서 정신적 활동에의 추이(推移)라는 것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지력(知力)과
노력을 기울여 아쉬운 대로 그 가능성이나마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인생에 관계없는 것, 즉 생명의 기원(起源)에 대한 의문(그것이 정신
자재 설이든, 활력론이든, 혹은 다른 상상적인 세력이던 간에
관계없지만)에 대해서의 논의는 인간에게서 인생의 중요한 문제, 즉

이것이 없으면 인생에 대한 관념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문제를
옹폐(壅蔽)해 버렸다. 그리고 조금씩이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또 매우 황급히 걸어다니기까지 하지만, 자기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 인간의 생태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이 현재 취하고 있는 방향에서 주어진 거대한 결과에
일부러 눈을 감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결과라 한들 그릇된

방향을 수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가령 불가능한 일은―오늘날의 과학이
생명에 관해서 알려고 원하는 일이나, 단정을 내리고 있는 일 따위, (과학
자체도 그것을 믿고 있지는 않지만)―그러한 모든 일이 밝혀지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즉 모든 것이 분명히 된다. 해처럼 분명히 된다고 가정하자.
어떤 순응(順應)의 길을 거쳐서 유기물이 무기물질로부터 생기는 것이
분명하다면, 또 어떻게 해서 물질적 에너지가 감정 의지 사상으로

변화되는 가도 분명하고, 이러한 일은 모두 중학생만 아니라 마을의
국민학교 어린이들까지도 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나도 이러이러한 사상 감정은 이러이러한 운동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대체 나는 이 사상이든 저 사상이든,
사상을 나자신의 마음 속에 환기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운동을 지도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대체 나는 나 자신이나 남의 마음에 어떠한

사상 감정을 일으킬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손도 대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는 과학자들이 난처해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간단한 것같이 생각된다. 마치
아무리 어려운 문제의 해결이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간단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인생을 어떻게 정리(整理)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도 그것이 우리들의 수중에 있는 한 과학자들에게는 지극히
간단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인생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한다. 과학은 그 방법을 마련한다.

첫째로는 요구의 만족을 올바르게 배분하기 위해서, 둘째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쉽고 풍부하게 생각해내서 모든 요구가 쉽게 만족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요구란 무엇이냐? 요구의 한도는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역시 간단하게 대답한다. 과학,
과학이 있는 것이 그것 때문이다. 과학은 많은 요구를 육체적 지적 미적

내지 도덕적으로까지도 분류해서, 어떠한 요구가 어떠한 한도에 있어서
옳고, 어떠한 요구가 어떠한 한도 안에서 옳지 못한가를 분명히 결정하는
것이라고.

과학은 시간과 더불어 그것을 결정해 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요구의 옳고 그릇됨을 결정하는 표준에 관해서 묻는다면, 이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용감하게 대답할 것이다. 요구를 연구함으로써 라고.

그러나 요구라는 말은 그저 두 가지 뜻밖에 없다. 그 하나는 존재의
조건인데, 각 사물의 이 존재 조건은 무한하므로 그 조건을 모조리 연구해
버릴 수는 없다. 또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행복의

요구로써, 그것은 그저 의식에 의해서만이 인정되고 결정되는 것이므로
실험과학에 의해서 연구될 가능성은 더욱더 적은 것이다.
하기야 세상에는 틀림없이 과학이라고 불리우는 것같은 제도라고나

할까, 사람들이나 학자들의 단체라고나 할까, 희합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것들은 있다. 과학도 그러한 것들만은 시간과 더불어 결정해 나갈 것이다.
과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모두 메시아 역할을 과학이 맡아하고 있는,

바꾸어 말하면 메시아의 왕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설명으로써
무엇인가를 설명케 하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메시아를 믿고 있듯이, 무조건
과학의 독단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과학의

사도(使徒)들은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가 다른 점은 그저 정통
유태교도는 메시아를 신의 사자(使者)라고 믿으므로 그가 그 힘으로써
삼라만상을 교묘하게 정리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으나, 과학의 사도들은

문제의 본질상, 요구의 외면적 연구에 의해서 인생에 관한 유일한 주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