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별관신사 2014. 2. 17. 09:06

인생의 모순은 옛적부터 인류에 의해서 인정되어 왔다.
인류의 개척자들은 이 내적 모순을 해결할 인생의 정의를
사람들에게 계시(啓示)하였으나, 바리새의 무리나 학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의 눈에서 숨기고 있다.



처음 인간에게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그 일신의
행복이다. 그러나 개인을 위해서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인생에 행복 비슷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개인에게만 행복이 가능한 인생,

개인적 인생은 일거일동, 호흡마다 고뇌로, 악으로, 죽음으로, 파멸의
구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은 사리를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젊은이나, 늙은이나, 식자나, 무식자나, 다같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하고 빤한 일이다. 이 고찰은 아주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사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태초부터

인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터이다.
「서로 멸망시키거나 스스로 멸망하는 똑 같은 무수한 개성 중에서,
자기 일개의 행복만을 마음먹는 개성으로서의 인간생활은 삭막(索漠)하며

무의미한 것이다. 참된 생활은 그와 같은 것일 리 없다」라고 인간은 아주
옛적부터 자신에게 타일러 왔다.
인간생활의 이 내적 모순은 비상한 힘과 명료성을 띠고, 인도 중국

이집트 희랍 유태의 현인(賢人)들에 의하여 표명(表明)되여 왔다. 그리고
저 아득한 옛적부터 인간의 이성(理性)은 인간 상호의 생존 투쟁이나,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는 멸망되는 일이 없는, 그와 같은 인류의 행복을

찾아내는데 지향되어 왔다. 그리하여 투쟁 고통 죽음 등에 의해서
없어지지 않는 틀림없는 인간의 이 행복을 더욱더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들이 인생을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의 끊임없는

진보가 있는 것이다.
매우 아득한 옛적부터, 수많은 여러 국민들 사이에서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내적 모순을 풀어 주는 인생의 정의를

계시하고는, 그들에게 인류에 합당한 참된 행복과 참된 생활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위치는 동일하며, 따라서 그 개인적
행복에 대한 희구와 그것을 불가능케 하는 의식사이에 개재하는 모순은 그

누구에게도 동일한 것이므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식자들이 사람들에게
계시해 준 참된 행복에 대한 참된 인생의 모든 정의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인생이란―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그들 속으로 광명이
남김없이 비치는 일이다」라고 공자(孔子)는 기원 600년 전에 말했다.
「인생이란―끊임없이 더욱 큰 행복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의 순례이며

완성이다」라고 공자와 같은 시대의 바라문교도들은 말했다.
「인생이란―행복한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한 자기 부정이다」라고
역시 공자와 동시대인 석가모니는 말했다.

「인생이란―행복에 이르기 위한 온량 겸허(溫良謙虛)의
도(道)이다」라고 역시 공자와 같은 시대인인 노자(老子)는 말하였다.
「인생이란―인간이 신의 법칙을 지키면서 행복을 얻도록 신이 인간의

콧구멍 속에 불어넣으신 입김이다」라고 유대의 어느 현인은 말했다.
「인생이란―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이성에 따르는 일이다」라고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말했다.

「인생이란―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예수는 모든 선인들의 정의를 자기의 정의 속에 총괄해서
말하였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는 수천년 동안, 우리들 인류에게 불가능하고
그릇된 개인적 행복 대신에, 깨뜨릴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지적하는데
있어서, 인간생활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그것에 합리적인 의의를 주는

인생의 정의는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그와 같은 인생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한 정의를 더욱더 정확하고 더욱
명료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들은 그것을 승인함이 인생의 모순을 배제하고 도달하기 어려운
개인적 행복에 대한 경향을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도 깨뜨려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경향으로 바꿔서 인생에 합리적인 의의를 주는 따위의 것이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인간의 그러한 정의는 이론적으로 옳을
뿐더러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다는 것, 그와 같은 인생의 정의를
과거에도 승인하였고, 현재에도 승인하고 있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개인적 행복에 대한 경향을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 깨뜨려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다른 경향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사실상으로
증명하였으며, 또 현재도 증명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류의 위대한 계발자(啓發者)들에 의해서 계시된
인생의 정의를 이해하고, 그것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밖에도 일생의
어느 기간, 때로는 전 생애를 통해서 그저 동물적인 생활에만 그치고,

비단 인간생활의 모순을 해결하기에 소용되는 그와 같은 정의를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선현들이 해결하고 있는 인생의 그러한 모순을 알아차리기
조차도 못하고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으며, 또 지금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는 또 자기의 외적 지위로 자신을
인류의 지도자인 양 생각하고, 스스로는 인간생활의 뜻조차 모르는 주제에
자신도 모르는 인생을, 인생이란 개인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라고 남에게

가르쳐 왔고, 또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과거에도 있었으며 또 현재에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이비 교사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에도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저들이 그 전통을
받아서 키워져온 인류의 계발자들의 교의 (敎義)를 입으로는 떠들지만
워낙 그 합리적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느덧 그러한 교의를 인류의

과거와 미래생활에 관한 초자연적 계시로 만들고, 그저 형식적 의식의
실행만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극히 넓은 의미에서의 바리새인, 즉
인생은 원래 불합리한 것이지만 형식적 의례의 실행으로 얻어지는

내세(來世)의 신앙만 있으면 그것에 의하여 수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자들의 교의이다.
또 어떤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인생 이외에는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기적을 부정하며, 모든 초자연 물을 주정하고,
인생은 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동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서슴치 않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부분의 학자들, 즉

동물로서의 인간생활에는 좀처럼 불합리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교의이다.
이들 두 가지 종류의 가짜 교사들이 말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인간생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서투른 몰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늘 시비해 왔으며 또 지금도 서로 다투고 있다. 이들 두
가지 교의는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서로 적의를 품고

자기를 스스로의 논쟁으로써 세계를 가득 채우고, 그러한 논쟁 그 자체에
의해서 이미 수천년전에 인류에게 주어져 있는 인간의 참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계시하는 인생의 정의를 사람들의 눈에서 감추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전통 속에서 키워지면서 그
스승들이 사람들에게 준 인생의 정의를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미래생활에

대한 저들의 그릇된 해석으로써 고치고, 동시에 인류의 다른 계시자들이
가르쳐 준 인생의 정의를 사람들의 눈에서 감추려고 제멋대로 서툴고 아주
엉터리로 고쳐 버린 꼴로 저들의 제자들 앞에 터놓으므로 인해서 해석의

기초로 했던 교의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인류의 다른
계발자들이 보여 준 인생의 정의에 있어서의 합리적 의의의 일치도
저들에게는 그 교의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는 좋은 증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들이 그 교의의 본질과 바꿔친 저들의
불합리한 거짓 해석에 대한 신뢰를 한꺼번에 뒤집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교의 발생의 기초로 되어

있는 합리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고, 그냥
미래생활에 관한 일체의 교의를 부정하고, 대담하게도 그러한 교의는
아무런 근저(根抵)도 없는 무지시대의 사나운 습관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더구나 또 인류의 진보는 이간의 동물적인 존재
영역을 넘고서는 여하한 인생 문제도 인간에게 부과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