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와 마찬가지로, 한 이미지는 그의 주위와 그의 속에 있는 다른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이 이미지를 좋아해, 나는 이걸 간직할 거야>라고 말하거나 <나는 그 이미지를
싫어하니까 그걸 버려야겠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관찰자 자신이 여러 가지 다른
이미지들에 대한 반응을 통해 생긴 여러 이미지들에 의해 짜맞취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른다-<관찰자 역시 이미지이며, 그는 다만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바라보고 있을 다름이다. 여러 가지 다른 이미지들을 통해 존재하게 된
이 관찰자는 그 자신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그 자신과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
사이에 그는 하나의 경계, 시간적 거리를 만들었다. 이것이 그 자신과 그가 그의 고민의
원인이라고 믿는 이미지들 사이에 갈 등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는 <이 갈 등을
없애야겠어>라고 말하지만, 그 갈등을 없애려는 욕망 바로 그것이 또 하나의 이미지를 낳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앎-이것이 참된 명상인데-은 모든 다른 이미지들에 의해 짜맞춰진 중심
이미지가 있음을 드러냈으며, 이 중심 이미지, 즉 관찰자는 검열관이고, 경험자이고,
평가자이며, 다른 이미지들을 정복하거나 종속시키거나 혹은 완전히 파괴하고 싶어하는
심판자이다. 그 다른 이미지들은 관찰자에 의한 판단, 견해, 결론들의 결과이며, 그리고
관찰자는 모든 다른 이미지들의 결과이다-따라서 관찰자는 관찰되는 자이다.
그리하여 앎은 마음의 다른 상태들을 드러냈고, 여러 이미지와 그 이미지들 사이의 모순을
드러냈고, 그에 따른 갈등과 그것에 관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과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여러 시도들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망설이는 앎을
통해 드러났고, 그러자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이것을 알게 된 자는 어떤
우월한 실재가 아니며, 어떤 높은 자아가 아니다(우월한 실재, 높은 자아 등은 만들어 낸
것이며 한술 더 뜬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것을 드러낸 것은 앎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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