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문할는지 모른다-그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실재는 그럼 누구인가? 그리고 알려고
하는 실재는 누구인가? 만일 그 실재가 의식의 일부, 생각의 일부라면, 해답을 찾는건
불가능하다. 그것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앎의 상태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 앎의 상태 속에
여전히 <나는 알아야 해, 나는 앎을 연습해야 해>라고, 말하는 실재가 있다면, 그건 다시 또
하나의 이미지이다.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이 인식은 관찰되는 것과의 동일화 과정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을
어떤 것과 동일화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어떤 것-우리의
가족, 남편이나 아내, 나라 등-과 동일시하며, 그것이 커다란 불행과 큰 전쟁을 낳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핵심,
우리 존재의 뿌리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옛 중국에서는 화가가 어떤 것-예컨대
나무-을 그리기 전에 그 앞에 앉아서, 며칠이든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가 그
나무일 때까지 않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는 자신을 나무와 동일화한 것이 아니라
그가 나무였다. 이것은 그와 나무 사이에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며,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에 거리가 없었다는 것, 아름다움, 움직임, 그림자, 잎의 깊이, 색깔의 질 따위를 체험하는
체험자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완전히 그 나무였고, 그런 상태에서만 그는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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