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걸 그가 깨닫지 못했다면, 관찰자 쪽의 어떠한 움직임도
단지 또 다른 일련의 이미지를 만들 뿐이며 그리고 그는 다시 그것들 속에 갇힐 따름이다.
그러나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라는 사실을 관찰자가 알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가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천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관찰자는 전혀 행동하지 않는다. 관찰자는 언제나 <나는 이
이미지들에 관해 뭔가를 해야 해, 나는 그것들을 억압하거나 그것들에 다른 모습을 주어야
해>라고 말해왔다. 다시 말해서 그는 관찰된 것에 대해 언제나 능동적이며, 정열적이며
혹은 무심코 활동하고 반응하며, 그리고 관찰자 편에서의 그 좋아하는 행동 및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불리었다-<나는 좋아한다, 그러므로 나는 붙잡아야 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에 관해서 행동하는 그것이 다름 아닌 그
자신임을 관찰자가 깨달을 때, 그 자신과 이미지 사이에는 아무 갈등도 없다. 그가 그것이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 그가 떨어져 있을 때, 그는 그것에 관해 무엇인가
했거나 하려고 했지만, 그가 그것임을 관찰자가 깨달을 때, 거기엔 좋아함과 싫어함 및 갈등이
있지 않다.
무엇을 위해서 그는 해야 하는가? 만일 어떤 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것에 대항할 수 없고 그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으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조차 없다.
그것은 거기 있다. 그래서 좋음과 실음에 대한 반응의 결과로서의 모든 행동은 끝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엄청나게 생동적이 된 앎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어떤 중심
문제나 이미지에도 묶여 있지않으며, 그리고 그 앎의 강렬함으로부터 아주 다른 질의 주의력이
나오고, 따라서 마음은-왜냐하면 마음이 이 앎이기 때문에-엄청나게 민감해지고 고도로
총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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