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오늘 아침, 끝을 뾰족하게 갈은 여섯 자루의
깃털달린 펜이 내 조그만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또 잉크병에는 푸른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브랑카 부인은 글을 모르지만, 단순한 친절을 넘어선
배려로 내게 필요한 도구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부인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인의 고운 마음씨에 가슴이 훈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I6d2년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 놀랍게도 내 강론 대본이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몬트로 주교에게서 어떤 조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필경 바르셀로나 교구장으로 임명을 받은 나머지, 지금 내 문제까지 다룰 만큼
그렇게 한가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몬트로 주교의 험상궂은 얼굴과
가늘게 뜬 눈매가 마치 단두쌔의 칼처럼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느낌이 든다.
그 해 나의 행운은 타라고나에 있는 예수회 부속 학교 부학장으로 임명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동부에 있는 이 작은 도시가 황혼길에 접어든
내 인생에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브랑카 부인과 그의 남편을 처음 만난 곳은 바로 이 타라고나에서였다.
강론대에서 눈을 떼면 그 부부는 언제나 신도석 맨 요줄에 앉아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른 신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이 경건한 부부는 그라우스에서
이사온 후. 교구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조촐하고 검소한 집을 얻어
살고 있으며. 건강한 숫말과 마차를 갖고 있고, 주일 미사는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타라고나에서 봉직한 기간 동안, 나는 강론을 하던 중에
이따금 한 신부가 내 강론 내용을 적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몬트로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필기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종류의 스파이 행위는 내
직속 상관에게조차 알려졌다. 내 상관인 오리빠레스 신부는 그들에게
도전이라도 하듯이 나를 보다 높은 직책인 발렌시아 수련학교 속죄 사제 및
설교자로 추천하였다. 브랑카 부부와 이별을 하게 되어 몹시 슬펐다, 그 당시
나는 마치 오늘의 일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주님의 뜻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한 기억이 난다.
1644년, 발렌시아의 성 이냐시오 교회의 교구 내에는 난폭한 젊은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들은 노동을 천시하고 예의를 가르치려는 사람들에게 사납게
덤벼들었다. 경건한 신도들 사이에 끼어들어 휘파람을 불고, 심지어 신부와
성가대를 향하여 야채를 던지는 괘씸한 소행을 저지르는 것도, 바로 이 흉폭한
무리들이었다.'나는 이곳에서 부먹한은 새로운 직책을 단순한 출세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곤란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처음 강론을 준비하면서 한가지 꾀를 내었다. 나는 그 젊은이들 가운데 두목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강론을 시작하였다.
'발렌시아의 선량한 교구민 여러분! 지금부터 편지를 한 장 읽어 드릴 테니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는 지옥에서 온 것입니다.'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적어도 사탄의 뵘에 빠져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찬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평상시에 온순했던 교구민들은 나의 허구에 찬 편지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작은
악당들에게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드디어 교구민들은 각목과 몽둥이와
주먹을 휘두르면서 문자 그대로 작은 악당들을 기습하여 교회 밖으로 쫓아
내었다. 불량배들은 대부분이 피를 흘렸고, 일부는 막강한 상대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후일 나는 이 사건으로 유명한 극작가인 칼데론 데 라파르카로부터 익살맞은
축하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몬트로 교구장이 보낸 학장의 우울한 방문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게 근신처분이 내려졌다. 나는 2주 동안
부학장으로서의 권리와 강론 의무를 박탈당했다. 또한 면담이 일체 불허되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펀지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식사는 하루에 한끼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이후 불량배들은 거의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고 간혹 출석한 자들도 엄숙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발렌시아에서의 2년 간(1644-1S46)은 곤란한 일도 있었지만, 수확도 많은
나날들이었다. 내가 성 이냐시오 교회를 떠날 즈음에는 교구의 질서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학장은 나를 깊이 포옹해 주었다. 1646년 초, 우에스카 교구로
발령났고 나는 집필에 몰두하여 일부 비평가들 사이에서 물의를 일으켰던
'사려깊은 인간'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나의 내면 속에 숨어 있는 공격성을
드러내었고, 특히 인간 본질에 대한 피상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모두가 옥처럼 섬겨야 할 전통적인
가치와 영혼의 본질을 상세하게 다루었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출판 허가를
간청하였고, 그 간청이 받아 들여졌지만, 엄격한 조건이 붙었다. 즉 앞으로는
일체 집필을 하지 말고 따라서 출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에
불복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감수하라는 위협이 포함되어 있는
조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내 머릿 속에는 집필이 중요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도시 레리타에 프랑스군이 즌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종군 신부를 자원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돈 디에고 페리페 데 구스만 군
휘하에 들어갔다. 나는 전투가 치열한 작전구역 안에 있었다. 나이 어린
병사들의 피로 물든 얼굴.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 모습은 차마 여기에서 글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가슴아픈 광경이었다. 이같은 고통으로 가득 찬 참상
속에서는 공포심 따위도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승리의 신부로
환호를 받았다 한들 조금도 명예스럽지 않았다. 죽음이란, 제 아무리 승리를
거둔 처지라 할지라도 결국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의 종군을
대담무쌍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단지 나 자신의 사명감을 성실히 수행하여, 부상자와 죽은 이들에게 위안
거리를 주려고 한 것에 불과했다.
절망감 속에서 1646년이 저물었다.사회불안은 커지고, 예절은 땅에
떨어졌다. 폭동은 일상의 다반사가 되었고 도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스페인
제국의 몰락은 도대체 그 끝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일상생활을 해 나가고 변함없이 생업에 종사하였다.
국운이 쇠잔할수록 교구민의 줏자는 블어만 갔다. 나는 강론을 하면서 그들이
고난 받을 때를 대비하여 비축해 둔 힘을 불러 일으키려고 기도를 드렸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에게 기도하던 증에 나는 다음과 같이 탄원하였다.
'부패한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교회에 대한 신심이 혼들리지
않게 해 주시고. 몸과 마음가짐을 정결케 해 주시고, 모범적인 삶을 살게
하시어 항상 올바르게 사물을 보고, 그 길로 갈 수 있는 품성을 주시고 ....
비록 이 영혼들이 암울한 시대에 빠져 있지만.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등대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나는 계속해서 희망과 신앙. 인내와 용기에 대해서 설진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데 근본적인 도구인 싱식을 강조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항상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감정의 찌꺼기를 남겨 두지 말라.
반론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일시적인 정신 상태에 쉽게
빠져들지 말라. 나설 때와 움츠릴 때를 잘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용을 취
하라.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보은을 비축해 두어라.
도의심을 소요한 사람과 교제하라. 찾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잘 알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나는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디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마음의 길을 밝히고. 명석한 결혼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촉구하여 왔다. 내
육체는 날이 갈수록 쇠잔하여 가지만, 그 당시의 설교 주제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인간의 두뇌란 마치 하나의
기적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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