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그러면 나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별관신사 2014. 12. 18. 02:53

그러면 나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불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내려고
하는가-그걸 달리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그것 자체에 있어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걸
어떻게 알아낼까? 나는 먼저 교회, 사회, 부모와 친구들, 모든 사람과 모든 책이 말한 것을

거부하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그게 무엇인지를 나 스스로 찾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인류가 연관되는 엄청난 문제가 있고, 그것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어 왔으며, 나는 이
순간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바에 따라 어떤 패턴이나 다른 틀에 붙잡혀 있다-그러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나 자신을 자신의 편향과 편견으로부터 해방해야 되지 않는가?
나는 혼란되어 있고, 나 자신의 욕망에 찢겨 있으며, 그래서 자신에게 말한다-<먼저 너 자신의
혼란을 정돈하라. 아마 너는 사랑이 아닌 것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정부는 <나라 사랑을 위해 가서 죽이라>고 말한다. 그게 사랑인가? 종교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섹스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게 사랑인가? 사랑은 욕망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서 그렇기 때문이다-쾌락을 누리려는 욕망, 즉

감각들을 통해서, 성적 접촉과 만족을 통해서 얻어진 쾌락 말이다. 나는 성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안다. 성이 당신에게 순간적으로 주는 것은 당신
자신의 완전한 포기이며,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 혼란과 더불어 원상태로 되돌아오는데,

그리하여 당신은 아무 걱정도, 아무 문제도 자아도 없는 그 상태가 자꾸 되풀이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사랑 속에는 성적 쾌락, 당신의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하는 사람을 집안에 갖고 있다는 쾌락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은 그녀에게

의존한다-그녀는 당신에게 그녀의 몸을 주었고, 그녀의 정서, 그녀의 고무, 어떤 안전감과
행복감에 의존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당신을 떠난다-그녀는 싫증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과
도망가며, 그러면 당신의 정서적 균형은 깨지고,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 교란이 질투라고

불리운다. 그 속에는 고통, 불안, 증오, 폭력이 있다. 그래서 당신이 정말 하고 있는 말은
이렇다. <네가 나한테 속해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그렇지 않는 순간
나는 너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내가 성적 요구나 다른 요구들을 만족 시키기 위해 너한테

의존하는 한 나는 너를 싫어한다.> 그러니까 당신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고, 분리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모든 대립 상태, 당신 자신 속에서의 끝없는 말다툼(불평) 없이 당신의 아내와 살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아마-아마-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자유롭고 그래서 그녀도 자유로우며, 반면에 당신이 당신의 모든 쾌락을 위해 그녀에게
의존한다면 당신은 그녀에 대해 노예이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렇게 남에게 속해 있는 것, 다른 사람에 의해 심리적으로 키워지는 것,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 모든 것 속에는 언제나 불안, 공포, 질투, 죄의식이 있으며, 공포가 있는 한 사랑은 없다.

슬픔으로 찌든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감상벽이나 주정주의는 사랑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쾌락이나 욕망과 아무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