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그릇된 과학은 인생에 수반되는 현상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인생 그....

별관신사 2014. 3. 27. 07:15

그릇된 과학은 인생에 수반되는 현상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인생 그
자체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가상하면서, 이 가상에 의해서 인생의
관념을 왜곡(歪曲)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과학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현상을 오래 연구하면 할수록 그 연구하려고 하는 인생의 관념에서
더욱더 멀어져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젖먹이 동물이 연구되고, 다음에는 다른 동물 척추동물 어류

식물 산호(珊瑚) 세포 현미경적 유기체가 연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업은 마침내 생물과 무생물과의 구별, 유기체와 무기체와의 한계, 어떤
유기체와 다른 유기체와의 차이점이 없어져버리는 데까지 추진(推進)된다.

연구와 관찰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서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것
따위까지 유도해 내기에 이른다. 인생의 비밀과 만유(萬有)의 설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추측되기만 하는, 오늘 발견되었는가 하면

내일은 벌써 잊혀지는 것 같은 미생물(微生物) 따위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모든 설명은 현미경적 존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생물이나, 또
그 생활 속에 들어 있는 생물이라고 하는 식으로 무한히 작은 것 속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마치 작은 것을 무한하게 나누는 일과 큰 것을
무한성은 그 무한성이 다르기나 하다는 듯이, 신비는 작은 것의 무한성이
끝까지 연구될 때 비로소 계시된다. 즉 바꾸어 말하면 영원히 계시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발견한다. 이 생각이야말로 그 문제가 그릇되게 과해져 있다는
뚜렷한 증명이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망(迷妄)의

최후 단계―연구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 있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는―이 단계가 과학의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즉
맹목(盲目)의 최후 단계가 시력의 최고도라고 생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길이 막혔다는 이 한 가지 일에 이해서
분명히 그들이 걸어온 길이 잘못임을 자기 앞에 입증했다. 더구나 그들의
열심에는 한도가 없다. 여기서 현미경을 조금 더 세계하면 우리들은

무기물의 유기물로의 이전이나, 유기물로부터 심리적 생물로의 이전을
이해하고, 인생의 비밀은 모조리 우리들에게 계시되리라는 식이다.
사람들은 물체 대신에 그림자를 연구하고, 그들은 그 그림자를 연구하고

있는 바로 그 물체는 아예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는 암흑 속으로 기어들어가서는 그림자가
짙다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의의는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 인간의 의식 속에 계시된다. 이
행복의 천명(闡明), 한층 적절하고 확실한 그 정의, 이것이 전 인류생활의
주된 목적과 과업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업은 곤란하므로, 즉

장난감이 아니라 노동이므로 사람들은 이 행복이 정의를 그것이 놓여 있는
곳, 즉 인간의 합리적 의식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곳곳에서―그저 그것이 표시되어 있는 장소 이외의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시(指示)를 적은 글을
받아두었으면서도 그것을 읽을 재간이 없어서 그 글을 내던지고 만다는

사람마다, 내게 필요한 것을 모르느냐고 묻고 있는 사람의 행위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인생의 정의를 도처에서 탐구한다. 그러나 다만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만은 도외시되고 있다. 인생의 정의, 즉 행복에 대한

동경(憧憬)으로 이것은 말살(抹殺)이 될 수 없는 문자로 인간의 영혼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 인류가 자기들의 가장 현명한
대표자라는 형식으로 「너희 신을 알라」고 하는 희랍의 격언(格言)에서

비롯해서,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오기도 하고, 오늘날에도 말하고
있으므로 해서 더욱더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할 일이다. 모든 종교적
교양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실제적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의 인생의

정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