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어려서부터 별난 사내였다. 그는
신동(神童)은 아니었으나 놀라울 만치 감각이 예민하였으며 상상력도
강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이와 동시에 동정심과
반항심도 유달리 강한 편이었으며 부끄러움도 잘 느끼는 편이었다 그는
1828년 8월 28일에 때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얼굴은 그다지 아름다운 편이 아니었으나 마음씨가 곱고
종교심이 두터운 교양이 높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 아버지는
핏줄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종교적인 면에 있어 그다지 볼 것이 없었다.
톨스토이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정신적으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아버지로부터는 핏줄기를 이어받은 것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군인 생활을 했었는데 1912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에도 참가하였다. 아버지의 이러한 종군생활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일로서 맨 처음의 기억은 무엇엔가 싸여서 양쪽 팔이
자유롭게 되지 않은 몸서리치는 기억이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 나를 싸고 있는 것을 풀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더 큰소리로 악착스럽게 울었다. 내가 그러한
것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왜 그들이 그런 것을 필요치
않다고 하는지를 보여줄려고 생각한 나머지 나 스스로도 싫증이 나는
아우성을 치면서 울어 보였다.」
이 기억의 실마리는 그의 만년에 있어 부인으로부터 둘둘 말려 방랑의
길이 늦어진 것과 깊은 인연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또한 그가 목욕탕에 들어가 앉았을 때, 유모가 솜씨 좋게 따뜻한
물속에서 재롱을 피우는 그를 골고루 문질러 줄 때에도 퍽 쾌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세 살이 될 때까지에는 이 두 가지의 기억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나 그의 마음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다.
톨스토이는 두 형과 누이동생들과 함께 지내다 남자 가정교사의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생활 환경이 바뀌어 처음에는 많은 고통을 느꼈었다. 이때의 일을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때까지 함께 지내온 사람들 (누이동생과 유모와 아주머니들)과
이별하는 것도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그마한
침실, 그리고 즐겨 사용해 온 베개, 장난감들과 이별하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첫걸음을 내어 디디게 된 새로운 생활이 두려웠다.
나는 나의 앞길에 열려질 그 새로운 생활 가운데서 즐거운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가정교사가 자기 편으로 이끌고자 부드러운 말
솜씨로 나를 대해주어 나는 그를 믿으려고 노력하였다. 누이들이
손아래인 나를 자기들의 틈바귀에 넣었을 때에 나타낸 어리석은 표정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나와 같이 큰 사내자식이 계집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2층에서 유모와 함께
지내온 그 생활에는 아무것도 좋은 일이 없었다라고 생각하려고 나는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어쩐지 두려웁고 슬펐었다.
천진난만하고도 티없는 행복이 돌이킬바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위신을 유지해 나가려고 하는 마음과 내 자신의 본분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자각으로 나는 겨우 버티어 나가는데 불과하였다. 그 후의 나의
생애(生涯)에서 내가 생활의 십자로(十字路)에 서서 새로운 길로 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에는 이런 생각을 몇 번이고 해온 것이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이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거룩한 아주머니 타챠나 아레크산도로오나의 참다운 인격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생애를 읽는 분이라면 그의 어머니에 비하여 혹은 그의
어머니보다도 더욱 위대하게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그다지 키가 크지 않았고 몸맵시는 좋았으며 머리가
검고 성격이 유순하며 다정하였다. 부모님에 비하여 나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 점으로 본다면 무엇보다도 가장 요긴한 추억의 주인공이었다. 나의
가슴에는 그 여성에 대한 즐거움과 감격에 복바친 애정이 아름답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형 니콜라이를 존경하고 있었으나 둘째 형 세루게이와는 약간의
틈이 있었다.
「나는 세루게이 형의 아름다운 모습과 뛰어난 노래에 감동하였고 그의
이기주의에 또한 감동하였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흉내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존경한 것은 니콜라이이다. 그와는 이야기하며
의논하고 싶었다.」
그는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그곳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정신적인 밑바침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집은 훌륭한
정원에 둘러싸인 커다란 주택이었지만 그가 태어난 방이 딸린 집은 20
세때 생활이 어려워 다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그는 여덟 살 때 형들이 학교 문제로 모스크바에서 살게 되었다.
모스크바로 옮겨간 그 이듬해 여름,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은 이상스런 죽음이었다. 친구 집에 가다가 길가에서
쓰러져 숨을 거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집사(執事)가 그를 독살한
것이 아니냐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돈도
없어졌고 신분을 알 수 없는 거지가 그의 아버지 명함을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장례식은 형 니콜라이와 고모에 의해
치뤄져 그는 아버지의 주검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아버지의 죽음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거리를 이리저리 다닌다면 틀림없이
아버지를 만나 볼 수 있으리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할 수도 없었으므로 아버지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과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슬픔과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의 가슴 속에 처음으로
죽음과 삶의 의문에 부딪힌 종교적인 공포의 정을 깨닫게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그후 아홉 달만에 또한 할머니가 돌아가셔 그는 죽음의 공포를
두번이나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정교사 센트 토마스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희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장난을 한 결과인지는 분명히 기억에 없지만 어쨌든 벌을
받을만한 실수도 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처음으로 나를 좁은 방에 가두어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를 위협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불만과 반항과
토마스에 대한 노여움뿐만 아니라 그가 나에게 강요한 벌칙에 대한 싫증
때문에 몹시도 무섭고 불안한 마음을 체험하였다. 이때의 일은 그후 내
일생을 통하여 모든 종류의 강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결같이 공포와
싫증을 느낀 원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톨스토이는 천진난만하면서도 놀라울 만치 감각이 예민하였으며
감수성이 매우 강했다. 토마스도 그러한 톨스토이를 싫어하진 않았다.
오히려 톨스토이의 참다운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여 때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무도 없는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2층에서 뛰어내리는가 하면 눈썹을 모조리 깎아 버리기도
하였다. 그는 [청년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거니와 100권 가까이 있는 소설 가운데서
눈썹이 많고 무섭게 생긴 열정적인 주인공이 있었다. 나는 내 모습을 그
주인공과 비슷하게 꾸며보고자 내 눈썹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조금
깎았으나 더 깍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한쪽 눈썹을 지나치게
깎아버려 하는 수 없이 양쪽 눈썹을 전부 깎아버렸다. 거울을 보고 거울
속에 비친 내 흉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놀랐었다. 얼마쯤 지나면
열정적인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눈썹이 나리라는 것을 믿으며, 스스로
마음을 위로해 보았으나 가족들에게 눈썹 없는 얼굴이 뜨이게 되어 그들이
비웃지나 않을까하고 걱정하였다. 나는 브르쟈라는 곳에서 화약을 사다가
그것을 눈썹에 바른 다음 불을 질렀다. 그랬더니 화약은 잘 타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불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나의 이러한
행동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드디어 열정적인 주인공의 일을 모조리
잊어버렸을 때 아니나 다를까 이전보다 더 많은 눈썹이 나게 되었다.」
한때는 공중을 날아보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몸을 쪼그리고 앉아 양쪽
무릎을 힘차게 꽉 조이면 틀림없이 공중으로 날을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세차게 조이면 조일수록 더 높이 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런 반면 어린 시절의 그는 무척
쾌활하였으며 낙천적이었다. 언제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농담도 즐기는
편이었으나 상대방이 지나치세 굴면 눈물을 지을 때도 이었다. 그는
형들이 장난스럽게 놀려대는 말에 도망을 치며 흐느끼기도 하였다.
그는 성장함에 따라 자기의 얼굴이 흉한 모양임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자기같이 못생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귀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어린 그는 자기의 험상궂은 얼굴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유년시대]에서 이러한 고백을 자세히 서술했다.
「.....가끔 절망의 순간이나를 괴롭혔다. 커다랗고 편편하게된 코와
두터운 입술과 몹시도 작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신에게 기적을 베풀어 나를
미남으로 개조해 달라고 나는 끊임없이 빌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현재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미래에 지닐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내어줄 것이다.」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소년들이 흔히 느끼는 감상을 그는 다른 소년들
보다 더 간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깊게 골똘히
생각했다. [소년시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까지 눈에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변하여 도무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장면으로 비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런 정신의 변화가 이번의
여행에서 처음으로 나의 마음에 깃들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나의
소년시대의 시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 나의 머리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분명히 떠올랐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는 우리들 이외에 또 다른 생활이 있어 우리들과는 어떠한
고통점도 없는, 우리들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우리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이 글은 그가 모스크바로 갈 때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라비아어와
터어키어 등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학에는 비교적 능숙한
편이었으나 역사와 통계학, 지리 등에 관한 실력은 부족하여 낙제하였다.
그러나 두 형은 카잔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점수가 부족한 과목에
한하여 재시험을 치루고 카잔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입학 시험 준비에
골몰하면서도 문학에 관한 서적을 구하는 대로 철저히 독파하였다. 또한
음악사를 완전히 연구하였으며 루소의 저서도 모두 읽어냈다. 그는
루소를 신처럼 추앙하였고 루소의 초상을 새긴 메달을 달고 다녔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루소의 영향은 모든 면에서 나타났고 농촌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루소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그의 생활은 일변하였다. 그는 사교계에도 나가
대환영을 받았다. 모스크바의 상류 사회에서 열리는 댄스 파아티는 물론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임이 있을 때마다 톨스토이는 특별 초대를 받았고
젊은 층으로부터는 눈부신 환영을 받았다.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연구가 사교계에서 환영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톨스토이 자신도
환영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자선사업을 위한 연극의 주연 또는 조연의
배우로서 데뷰하여 여러 번에 걸쳐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도 더 좋아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 공부에 대해서는 흥미를 갖지
않았다. 교수들이 강의하는 과목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학점을 충분히
따지 못하여 진급을 못하기도 하였다.
톨스토이는 과목 낙제의 경험을 맛본 다음 법과로 전과하려고 하여
원서를 제출한 결과 교수회의 승낙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학교의
과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이든 힘을 다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그는 이제 공부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다음 해 5월 진급시험에서 무난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해의 역사
강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강금당했다. 이때에
나쟈리엘이라는 학생도 톨스토이와 함께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는데
톨스토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교묘한 수단으로 초와
촛대를 몸에 지니고 들어가 불을 켜놓고 자못 쾌활한 표정으로 이틀
동안을 아무런 번민도 하지 않고 지냈다.」
나쟈리엘 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레르몬토프의 [악마]을 읽고 있을 때 톨스토이는 시(詩)란 것의
전체에 대하여 탐탁찮다는 태도를 보이더니 그 다음엔 내 곁에 있던
카라므친의 역사책을 발견하고 역사의 부당성을 맹렬히 지적하기
시작했다. 역사 같은 것은 몹시 싫증이 나는 쓸데없는 과목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면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역사는
노래와 실속 없는 사소한 일과 필요찮은 숫자의 모임과, 고유명사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며 역사의 서술방식은 모든 사실에 대해 사학가라는
교수들이 제멋대로 마련해 둔 빈약한 노트로써 무책임하게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톨스토이의 지나친 비평은 평소 역사를 좋아하던 나를 몹시
화나게 하였다. 톨스토이는 계속 회의적인 어조로 대학 및 대학의 학과에
관한 학문의 매장지(埋葬地)라고까지 언성을 높이며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이상야릇한 표정을 계속하면서 우리 학교 교수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만화로 그려 나의 냉정한 태도를 익살로 바꾸어 버렸다.
톨스토이는 이어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학문의 매장지에서
유능하고도 박식한 인물이 되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대관절 대학에서 무엇을 선물로 가지고 나가게 될 것인가? 양심에 비추어
신중히 생각할 문제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일에 요긴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또한 누구에게 필요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라며 열변을
토했다.」
톨스토이는 [청년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감정을 표현했다.
「내가 스스로 소년시대와, 청년시대의 경계(境界)라고 볼 수 있는 이
시기에 있어 나의 공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은 네 가지의 감정이었다.
첫째는 그 여자에 대한 사랑, 상상의 여성에 대한 연정인데 나는 상상
속에 나타나는 그 여성을 언제나 같은 뜻을 붙여 공상하고 여러 가지
순간에 어디에선가 만나 질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둘째의 감점은 사랑에 대한 애착인데 모두가 나를 알고 동시에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내가 내 이름을 공개할 때
모두가 이 공개에 놀라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인가에 대하여 내게 감사의
뜻을 표시해 주는 그런 것이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셋째의 감정은 범상치 않는 허영적인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
감정의 매서운 것과 집착성은 거의 정신 이상에 가까울 정도였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생겨 그 결과 뜻밖의 내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인간이 된다는 확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끊임없이 꿈같은 행복의 기대에 가슴이 어지러웠다.
넷째의 감정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싫증과
뉘우침과 한탄이었다. 그러나 이 뉘우침과 한탄은 행복에 대한 기대와
가깝게 맞닿고 있었으므로 슬픔과 설움의 성분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과거를 버리고 이전의 일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다음, 모든
관계를 한데 묶어 자기의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쯤은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과거는 조금도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마음의 고통도 없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싫증에 쾌감까지
발견하여 실제 이상으로 어두운 방법을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지나간
추억의 세계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밝고 깨끗한 미래의 광채가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이 뉘우침과 한탄과 자기 완성의 희망의 소리는 내가
발전해 나가는 이 시기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새로운 정신적
감각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이 소리가 자기 자신과 타인과 인생에 대한
나의 견해에 새로운 기초를 두게 한 것이었다. 즐거운 진실의 소리에
내가 지닌 정신이 오늘날의 허위와 방탕의 힘에 말없이 따르고자 개탄할
때에 그 소리가 모두 올바르지 못한 일에 버티어 과거의 잘못을 불살라
버리고 현재의 조촐한 마음으로 깨끗하고도 밝은 점만을 지향하여 이것을
사랑할 것이 강요됨과 아울러 미래에 있어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약속한
것이 그때부터 헤아려 몇 번이었는가를 생각하였다.」
톨스토이는 이때 진실한 것을 원하였고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진실한 것만이 그에게 있어 어둠을 밝혀주는 태양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처럼 자기 감정에 언제든지 극단적이었다. 그리고 몹시 과장된
것이었지만 문학 동호인들은 자칫 그것을 망각한다. 반면에 그는 어느
상태를 늘 동경하고 숭배하는 사색이 깊은 인간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사색이 깊은 인간과 취미를 갖지 못한 인간과를
구별하여 사색이 깊은 사람은 존경하고 그 자신과 모든 인연을 맺으려
하였으며 취미를 갖지 못한 사람은 몹시 싫어하였다.
그는 프랑스어를 잘하기를 원하였고 말끔한 옷차림과 사교계에서
뛰어나게 능숙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좁고도 사색적인 세계에만 파묻혀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생명력과 무엇인가 훌륭한 일을 해야한 되겠다는
자각에 불타고 이었다.
신동(神童)은 아니었으나 놀라울 만치 감각이 예민하였으며 상상력도
강하고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이와 동시에 동정심과
반항심도 유달리 강한 편이었으며 부끄러움도 잘 느끼는 편이었다 그는
1828년 8월 28일에 때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얼굴은 그다지 아름다운 편이 아니었으나 마음씨가 곱고
종교심이 두터운 교양이 높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톨스토이 아버지는
핏줄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종교적인 면에 있어 그다지 볼 것이 없었다.
톨스토이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정신적으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아버지로부터는 핏줄기를 이어받은 것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군인 생활을 했었는데 1912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에도 참가하였다. 아버지의 이러한 종군생활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자기의 일로서 맨 처음의 기억은 무엇엔가 싸여서 양쪽 팔이
자유롭게 되지 않은 몸서리치는 기억이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 나를 싸고 있는 것을 풀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더 큰소리로 악착스럽게 울었다. 내가 그러한
것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왜 그들이 그런 것을 필요치
않다고 하는지를 보여줄려고 생각한 나머지 나 스스로도 싫증이 나는
아우성을 치면서 울어 보였다.」
이 기억의 실마리는 그의 만년에 있어 부인으로부터 둘둘 말려 방랑의
길이 늦어진 것과 깊은 인연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또한 그가 목욕탕에 들어가 앉았을 때, 유모가 솜씨 좋게 따뜻한
물속에서 재롱을 피우는 그를 골고루 문질러 줄 때에도 퍽 쾌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세 살이 될 때까지에는 이 두 가지의 기억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하나 그의 마음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다.
톨스토이는 두 형과 누이동생들과 함께 지내다 남자 가정교사의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생활 환경이 바뀌어 처음에는 많은 고통을 느꼈었다. 이때의 일을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때까지 함께 지내온 사람들 (누이동생과 유모와 아주머니들)과
이별하는 것도 말할 수 없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그마한
침실, 그리고 즐겨 사용해 온 베개, 장난감들과 이별하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첫걸음을 내어 디디게 된 새로운 생활이 두려웠다.
나는 나의 앞길에 열려질 그 새로운 생활 가운데서 즐거운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가정교사가 자기 편으로 이끌고자 부드러운 말
솜씨로 나를 대해주어 나는 그를 믿으려고 노력하였다. 누이들이
손아래인 나를 자기들의 틈바귀에 넣었을 때에 나타낸 어리석은 표정을
다시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나와 같이 큰 사내자식이 계집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2층에서 유모와 함께
지내온 그 생활에는 아무것도 좋은 일이 없었다라고 생각하려고 나는 무척
노력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어쩐지 두려웁고 슬펐었다.
천진난만하고도 티없는 행복이 돌이킬바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위신을 유지해 나가려고 하는 마음과 내 자신의 본분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자각으로 나는 겨우 버티어 나가는데 불과하였다. 그 후의 나의
생애(生涯)에서 내가 생활의 십자로(十字路)에 서서 새로운 길로 발을
내디디려고 할 때에는 이런 생각을 몇 번이고 해온 것이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이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거룩한 아주머니 타챠나 아레크산도로오나의 참다운 인격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생애를 읽는 분이라면 그의 어머니에 비하여 혹은 그의
어머니보다도 더욱 위대하게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한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그다지 키가 크지 않았고 몸맵시는 좋았으며 머리가
검고 성격이 유순하며 다정하였다. 부모님에 비하여 나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 점으로 본다면 무엇보다도 가장 요긴한 추억의 주인공이었다. 나의
가슴에는 그 여성에 대한 즐거움과 감격에 복바친 애정이 아름답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형 니콜라이를 존경하고 있었으나 둘째 형 세루게이와는 약간의
틈이 있었다.
「나는 세루게이 형의 아름다운 모습과 뛰어난 노래에 감동하였고 그의
이기주의에 또한 감동하였다. 그래서 그의 행동을 흉내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존경한 것은 니콜라이이다. 그와는 이야기하며
의논하고 싶었다.」
그는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그곳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정신적인 밑바침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집은 훌륭한
정원에 둘러싸인 커다란 주택이었지만 그가 태어난 방이 딸린 집은 20
세때 생활이 어려워 다른 지주에게 팔아버렸다.
그는 여덟 살 때 형들이 학교 문제로 모스크바에서 살게 되었다.
모스크바로 옮겨간 그 이듬해 여름, 그는 아버지를 잃었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은 이상스런 죽음이었다. 친구 집에 가다가 길가에서
쓰러져 숨을 거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집사(執事)가 그를 독살한
것이 아니냐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돈도
없어졌고 신분을 알 수 없는 거지가 그의 아버지 명함을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장례식은 형 니콜라이와 고모에 의해
치뤄져 그는 아버지의 주검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아버지의 죽음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거리를 이리저리 다닌다면 틀림없이
아버지를 만나 볼 수 있으리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할 수도 없었으므로 아버지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과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슬픔과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자기의 가슴 속에 처음으로
죽음과 삶의 의문에 부딪힌 종교적인 공포의 정을 깨닫게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그후 아홉 달만에 또한 할머니가 돌아가셔 그는 죽음의 공포를
두번이나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가정교사 센트 토마스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희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장난을 한 결과인지는 분명히 기억에 없지만 어쨌든 벌을
받을만한 실수도 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처음으로 나를 좁은 방에 가두어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를 위협하였다. 거기에서 나는 불만과 반항과
토마스에 대한 노여움뿐만 아니라 그가 나에게 강요한 벌칙에 대한 싫증
때문에 몹시도 무섭고 불안한 마음을 체험하였다. 이때의 일은 그후 내
일생을 통하여 모든 종류의 강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결같이 공포와
싫증을 느낀 원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톨스토이는 천진난만하면서도 놀라울 만치 감각이 예민하였으며
감수성이 매우 강했다. 토마스도 그러한 톨스토이를 싫어하진 않았다.
오히려 톨스토이의 참다운 가치를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모험을 좋아하여 때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무도 없는 식사
시간을 이용하여 2층에서 뛰어내리는가 하면 눈썹을 모조리 깎아 버리기도
하였다. 그는 [청년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거니와 100권 가까이 있는 소설 가운데서
눈썹이 많고 무섭게 생긴 열정적인 주인공이 있었다. 나는 내 모습을 그
주인공과 비슷하게 꾸며보고자 내 눈썹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조금
깎았으나 더 깍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한쪽 눈썹을 지나치게
깎아버려 하는 수 없이 양쪽 눈썹을 전부 깎아버렸다. 거울을 보고 거울
속에 비친 내 흉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놀랐었다. 얼마쯤 지나면
열정적인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눈썹이 나리라는 것을 믿으며, 스스로
마음을 위로해 보았으나 가족들에게 눈썹 없는 얼굴이 뜨이게 되어 그들이
비웃지나 않을까하고 걱정하였다. 나는 브르쟈라는 곳에서 화약을 사다가
그것을 눈썹에 바른 다음 불을 질렀다. 그랬더니 화약은 잘 타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불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나의 이러한
행동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드디어 열정적인 주인공의 일을 모조리
잊어버렸을 때 아니나 다를까 이전보다 더 많은 눈썹이 나게 되었다.」
한때는 공중을 날아보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몸을 쪼그리고 앉아 양쪽
무릎을 힘차게 꽉 조이면 틀림없이 공중으로 날을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세차게 조이면 조일수록 더 높이 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런 반면 어린 시절의 그는 무척
쾌활하였으며 낙천적이었다. 언제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농담도 즐기는
편이었으나 상대방이 지나치세 굴면 눈물을 지을 때도 이었다. 그는
형들이 장난스럽게 놀려대는 말에 도망을 치며 흐느끼기도 하였다.
그는 성장함에 따라 자기의 얼굴이 흉한 모양임을 한탄하기도 하였다.
자기같이 못생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귀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어린 그는 자기의 험상궂은 얼굴에 스스로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유년시대]에서 이러한 고백을 자세히 서술했다.
「.....가끔 절망의 순간이나를 괴롭혔다. 커다랗고 편편하게된 코와
두터운 입술과 몹시도 작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신에게 기적을 베풀어 나를
미남으로 개조해 달라고 나는 끊임없이 빌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현재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미래에 지닐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내어줄 것이다.」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소년들이 흔히 느끼는 감상을 그는 다른 소년들
보다 더 간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깊게 골똘히
생각했다. [소년시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금까지 눈에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변하여 도무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장면으로 비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런 정신의 변화가 이번의
여행에서 처음으로 나의 마음에 깃들게 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나의
소년시대의 시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때 나의 머리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분명히 떠올랐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는 우리들 이외에 또 다른 생활이 있어 우리들과는 어떠한
고통점도 없는, 우리들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우리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라고.」
이 글은 그가 모스크바로 갈 때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라비아어와
터어키어 등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학에는 비교적 능숙한
편이었으나 역사와 통계학, 지리 등에 관한 실력은 부족하여 낙제하였다.
그러나 두 형은 카잔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점수가 부족한 과목에
한하여 재시험을 치루고 카잔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입학 시험 준비에
골몰하면서도 문학에 관한 서적을 구하는 대로 철저히 독파하였다. 또한
음악사를 완전히 연구하였으며 루소의 저서도 모두 읽어냈다. 그는
루소를 신처럼 추앙하였고 루소의 초상을 새긴 메달을 달고 다녔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루소의 영향은 모든 면에서 나타났고 농촌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루소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그의 생활은 일변하였다. 그는 사교계에도 나가
대환영을 받았다. 모스크바의 상류 사회에서 열리는 댄스 파아티는 물론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임이 있을 때마다 톨스토이는 특별 초대를 받았고
젊은 층으로부터는 눈부신 환영을 받았다. 그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연구가 사교계에서 환영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톨스토이 자신도
환영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자선사업을 위한 연극의 주연 또는 조연의
배우로서 데뷰하여 여러 번에 걸쳐 성공을 거두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도 더 좋아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 공부에 대해서는 흥미를 갖지
않았다. 교수들이 강의하는 과목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학점을 충분히
따지 못하여 진급을 못하기도 하였다.
톨스토이는 과목 낙제의 경험을 맛본 다음 법과로 전과하려고 하여
원서를 제출한 결과 교수회의 승낙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학교의
과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이든 힘을 다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그는 이제 공부하는데 모든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다음 해 5월 진급시험에서 무난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해의 역사
강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치장에 강금당했다. 이때에
나쟈리엘이라는 학생도 톨스토이와 함께 유치장에 감금당하였는데
톨스토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교묘한 수단으로 초와
촛대를 몸에 지니고 들어가 불을 켜놓고 자못 쾌활한 표정으로 이틀
동안을 아무런 번민도 하지 않고 지냈다.」
나쟈리엘 또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레르몬토프의 [악마]을 읽고 있을 때 톨스토이는 시(詩)란 것의
전체에 대하여 탐탁찮다는 태도를 보이더니 그 다음엔 내 곁에 있던
카라므친의 역사책을 발견하고 역사의 부당성을 맹렬히 지적하기
시작했다. 역사 같은 것은 몹시 싫증이 나는 쓸데없는 과목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면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역사는
노래와 실속 없는 사소한 일과 필요찮은 숫자의 모임과, 고유명사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며 역사의 서술방식은 모든 사실에 대해 사학가라는
교수들이 제멋대로 마련해 둔 빈약한 노트로써 무책임하게 강의하고
있다고 했다. 톨스토이의 지나친 비평은 평소 역사를 좋아하던 나를 몹시
화나게 하였다. 톨스토이는 계속 회의적인 어조로 대학 및 대학의 학과에
관한 학문의 매장지(埋葬地)라고까지 언성을 높이며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이상야릇한 표정을 계속하면서 우리 학교 교수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러운 만화로 그려 나의 냉정한 태도를 익살로 바꾸어 버렸다.
톨스토이는 이어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학문의 매장지에서
유능하고도 박식한 인물이 되어 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대관절 대학에서 무엇을 선물로 가지고 나가게 될 것인가? 양심에 비추어
신중히 생각할 문제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일에 요긴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또한 누구에게 필요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라며 열변을
토했다.」
톨스토이는 [청년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감정을 표현했다.
「내가 스스로 소년시대와, 청년시대의 경계(境界)라고 볼 수 있는 이
시기에 있어 나의 공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은 네 가지의 감정이었다.
첫째는 그 여자에 대한 사랑, 상상의 여성에 대한 연정인데 나는 상상
속에 나타나는 그 여성을 언제나 같은 뜻을 붙여 공상하고 여러 가지
순간에 어디에선가 만나 질문을 기대하고 있었다.
둘째의 감점은 사랑에 대한 애착인데 모두가 나를 알고 동시에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내가 내 이름을 공개할 때
모두가 이 공개에 놀라 나를 둘러싸고 무슨 일인가에 대하여 내게 감사의
뜻을 표시해 주는 그런 것이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셋째의 감정은 범상치 않는 허영적인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
감정의 매서운 것과 집착성은 거의 정신 이상에 가까울 정도였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생겨 그 결과 뜻밖의 내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인간이 된다는 확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끊임없이 꿈같은 행복의 기대에 가슴이 어지러웠다.
넷째의 감정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싫증과
뉘우침과 한탄이었다. 그러나 이 뉘우침과 한탄은 행복에 대한 기대와
가깝게 맞닿고 있었으므로 슬픔과 설움의 성분은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과거를 버리고 이전의 일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다음, 모든
관계를 한데 묶어 자기의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쯤은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과거는 조금도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마음의 고통도 없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싫증에 쾌감까지
발견하여 실제 이상으로 어두운 방법을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지나간
추억의 세계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밝고 깨끗한 미래의 광채가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이 뉘우침과 한탄과 자기 완성의 희망의 소리는 내가
발전해 나가는 이 시기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새로운 정신적
감각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이 소리가 자기 자신과 타인과 인생에 대한
나의 견해에 새로운 기초를 두게 한 것이었다. 즐거운 진실의 소리에
내가 지닌 정신이 오늘날의 허위와 방탕의 힘에 말없이 따르고자 개탄할
때에 그 소리가 모두 올바르지 못한 일에 버티어 과거의 잘못을 불살라
버리고 현재의 조촐한 마음으로 깨끗하고도 밝은 점만을 지향하여 이것을
사랑할 것이 강요됨과 아울러 미래에 있어서의 즐거움과 행복을 약속한
것이 그때부터 헤아려 몇 번이었는가를 생각하였다.」
톨스토이는 이때 진실한 것을 원하였고 여러 가지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진실한 것만이 그에게 있어 어둠을 밝혀주는 태양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처럼 자기 감정에 언제든지 극단적이었다. 그리고 몹시 과장된
것이었지만 문학 동호인들은 자칫 그것을 망각한다. 반면에 그는 어느
상태를 늘 동경하고 숭배하는 사색이 깊은 인간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사색이 깊은 인간과 취미를 갖지 못한 인간과를
구별하여 사색이 깊은 사람은 존경하고 그 자신과 모든 인연을 맺으려
하였으며 취미를 갖지 못한 사람은 몹시 싫어하였다.
그는 프랑스어를 잘하기를 원하였고 말끔한 옷차림과 사교계에서
뛰어나게 능숙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좁고도 사색적인 세계에만 파묻혀 있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생명력과 무엇인가 훌륭한 일을 해야한 되겠다는
자각에 불타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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