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목소리는 점점 분명히 인간에게 들려오게 된다. 사람들은 점점
많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개인적
행복과 그릇된 의무로 인간을 부르는 소리보다 힘차게 될 때가 오고 있고,
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혹을 수반하는 개인 생활이
행복을 줄 수 없다 함이 더욱더 뚜렷해짐과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사람들에 의해서 규정된 모든 부채반상(負債返償)이라는 것이 사실인 즉,
인간이 그로부터 나온 합리적이며 행복한 기원에 대한 유일한 부채를
갚아야 할 지불의 기능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어떤 합리적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낡은 기만은, 벌써 닳아 끊어져 버렸으므로, 다시 거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곧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생각하지 말아. 우리들이
규정하는 의무를 믿으라. 개성은 너를 속일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너에게 인생의 참된 행복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믿으려 애써 보기도 하고, 또 믿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섭(交涉)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믿고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그 다른 일은 사람 나름으로 큰 행복을 주고 있음을
확증했다. 그래서 수많은 신앙 중에서 어느 신앙이 더 진실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 하는 판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인간이 항상 모든 것을 앎은 이성을 통해서이지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다. 한때는 인간이 무엇을 아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고,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단언해서 속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두 가지
신앙을 알게 되자, 그리고 그가 자기의 신앙을 찬미하듯이 다른 사람들이
다른 신앙을 찬미하는 것을 보게 되자, 그는 어찌해서든지 이성에 의해서
일을 해결해야 할 필요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불교도가 마호멧교를 알고
나서도 본디의 불교도대로 남아있는 것은, 결코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그런 것이다. 그의 앞에 다른 신앙이 나타나서 자기의
신앙을 저버릴 것인가, 혹은 또 새로이 계시된 신앙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무제가 생기게 되면, 이 문제는 불가피한 이성애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마호멧교를 알고서도 여전히 불교도로서 남아
있는 이상, 불타(佛陀)에 대한 이전의 맹목적 신앙은 이미 필연적으로
합리적 근거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제외하고 신앙에만 의해서 정신적 내용을 인간에게
주입(注入)시키려고 하는 현대의 시도(試圖)는 마치 그 자연의
수단(인간의 입)을 벌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양육하려는 시도와 같다.
사람들의 교류는 그들 일동에게 공통되는 그 지식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미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 죽은
자가 신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들은 자가 소생할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와있는 것이다.
이 목소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한 사람이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전 인류의 합리적 의식의 소리, 각 개인과 인류의
뛰어난 사람들과,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인
것이기 때문이다.
많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개인적
행복과 그릇된 의무로 인간을 부르는 소리보다 힘차게 될 때가 오고 있고,
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혹을 수반하는 개인 생활이
행복을 줄 수 없다 함이 더욱더 뚜렷해짐과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사람들에 의해서 규정된 모든 부채반상(負債返償)이라는 것이 사실인 즉,
인간이 그로부터 나온 합리적이며 행복한 기원에 대한 유일한 부채를
갚아야 할 지불의 기능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어떤 합리적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낡은 기만은, 벌써 닳아 끊어져 버렸으므로, 다시 거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곧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생각하지 말아. 우리들이
규정하는 의무를 믿으라. 개성은 너를 속일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너에게 인생의 참된 행복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믿으려 애써 보기도 하고, 또 믿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섭(交涉)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믿고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그 다른 일은 사람 나름으로 큰 행복을 주고 있음을
확증했다. 그래서 수많은 신앙 중에서 어느 신앙이 더 진실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 하는 판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인간이 항상 모든 것을 앎은 이성을 통해서이지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다. 한때는 인간이 무엇을 아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고,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단언해서 속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두 가지
신앙을 알게 되자, 그리고 그가 자기의 신앙을 찬미하듯이 다른 사람들이
다른 신앙을 찬미하는 것을 보게 되자, 그는 어찌해서든지 이성에 의해서
일을 해결해야 할 필요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불교도가 마호멧교를 알고
나서도 본디의 불교도대로 남아있는 것은, 결코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그런 것이다. 그의 앞에 다른 신앙이 나타나서 자기의
신앙을 저버릴 것인가, 혹은 또 새로이 계시된 신앙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무제가 생기게 되면, 이 문제는 불가피한 이성애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마호멧교를 알고서도 여전히 불교도로서 남아
있는 이상, 불타(佛陀)에 대한 이전의 맹목적 신앙은 이미 필연적으로
합리적 근거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제외하고 신앙에만 의해서 정신적 내용을 인간에게
주입(注入)시키려고 하는 현대의 시도(試圖)는 마치 그 자연의
수단(인간의 입)을 벌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양육하려는 시도와 같다.
사람들의 교류는 그들 일동에게 공통되는 그 지식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미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 죽은
자가 신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들은 자가 소생할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와있는 것이다.
이 목소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한 사람이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전 인류의 합리적 의식의 소리, 각 개인과 인류의
뛰어난 사람들과,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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