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는 역설을
피하고 정연한 이론을 내세워 훌륭하게 보인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를 보면 무섭다. 그는 삶의 문을
역설로 넘치는 삶의 문을 열어 젖히기 때문이다.
붓다도 역설적이고 노자도 역설적이다. 깨달은 자는
모두 역설적일 수 밖에 없다.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인 삶 자체에 진실한 것이다. 삶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삶은 로고스이지 논리가 아니다.
삶은 코스모스(조화)이지 카오스(혼돈)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삶은 논리가 아니다. 로고스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말을 많이
사용한다. 논리와 로고스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다.
논리는 진리를 설명하는 이론이며 로고스는 진리 그
자체이다. 로고스는 존재론적이지만 논리는 존재론적이지
않다. 논리는 지적이고 이론적이다. 이를 잘 이해하기
바란다. 삶을 잘 들여다 보면 삶 속에 이미 죽음도 있다.
죽음을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삶과 죽음은 함께 간다.
삶의 순간속에 죽음의 순간이 있다. 삶과 죽음은 둘로
가를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삶과 죽음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둘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을
깊이 들여다 보면 그대는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죽는 순간부터 다시 살기 시작할 것이다.
죽음이 삶속에 내포되어 있다면 삶도 죽음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 둘은 서로 포섭하고 서로를
보완한다. 삶과 죽음은 두개의 날개 혹은 두개의 다리와
같다. 그대는 한쪽 다리만으로는 걸을 수 없다.
삶속에서 그대는 좌익과 우익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대는 좌익이 될수도 있고 우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론속에는 삶이 없다.
있을 수 없다. 이론은 분명하고 명확해야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거대한 바다다.
위대한 시인이였던 휘트먼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나는 모순된 말을 서슴없이 한다. 왜나하면 나는 드넓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논리의 길을 가면 마음은 아주 좁아진다.
넓어질 수 없다. 삶 속에서 오는 모순을 두려워해서는
결코 드넓은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사물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데서 오는 모슨을 피하고 감추려고만 한다.
감춘다고 감춰지는가? 죽음을 그냥 외면한다고 죽음이
없어지는가? 등을 돌려서 죽음을 외면하고 완전히 망각할
수 있을 지 모르나.... 그래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린다.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 가지만
우리는 모두 외면하려 한다. 친지가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을 서둘러 처리해 버린다. 교외에 무덤을 만들어
장례를 피른 뒤 아무도 찿아가지 않는다. 혹은 무덤과
비석을 아름답게 대리석으로 꾸며놓고 꽃을 바치기도 한다.
무엇을 하는 건가? 무덤을 장식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죽음을 감추는 일이 전문직업이 되었다. 죽은 사람을 거의
살아있는 것 처럼 아름답게 꾸며서 죽음을 외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전문가들이 있다. 죽은 사람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그럴 순 없다.
그대는 지금도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무덤을 어디에
만드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언젠가는 무덤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대는 이미 무덤을 향해 출발했다.
줄을 지어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논리는 명백한 것을
원한다. 명백한 것을 얻기위해 논리는 진실을 피한다.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다.
둘은 별개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A는 A다. A는 결코
B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서양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사랑은 사랑이다. 미움은 미움이다.
사랑은 결코 미움이 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어리석다.
사랑속에 미움이 들어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없다. 피하려고 애를 쓰면 모든 것은 가짜로 변해
버린다. 그래서 그대의 사랑은 가짜다. 그대의 사랑은
진실하거나 참된것이 아니다. 겉모습만을 위해 꾸민것이다.
왜 겉모습을 꾸미게 되는가? 반대쪽을 피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친구다 친구는 적이 될 수 없다. 너는 나의 적이다.
그러므로 나의 친구가 될수없다 . 하지만 친구와 적은 동전의
양면이다. 적은 숨은 친구요 친구는 숨은 적이다.
반대쪽의 측면은 숨어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뿐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대가 양면을 동시에 보고 인정하는
일은 감당하기 힘들다. 친구에게서 숨어있는 적의 모습을
본다면 친구를 좋아할 수는 없으리라. 적에게서 숨어있는
친구의 모습을 본다면 적을 미워할 수 없으리라.
그래서 삶은 전체로 보면 수수께끼로 보인다. 그래서 인지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수수께끼의 헤라클레이토스라고
불렀다. 그는 수수께끼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삶에 진실
했을뿐이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는 삶을 이론화하지 않는다. 학설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삶이 일어나는대로
비춘다. 그대의 모습이 예쁘면 거울은 예쁜모습대로
비춘다. 곧바로 그대가 미운 모습을 하면 그 모습 역시
그대로 비춘다. 거울운 수수께끼를 내지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비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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