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

대립되는 것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려고 하지 말라.

별관신사 2020. 12. 31. 07:47

그대는 양쪽 모두를 살아야 한다. 어느쪽에도

집착하지 않고 양쪽 모두를 살 수 있다면 사랑

하면서도 주시자로 남고 미워하면서도 주시자로

 

남을 수 있다면 이 주시가 숨은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때 그대는 사랑과 미움이 변화무쌍한

기분일 뿐이며 계절처럼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상반되는 것들 안에서

게쉬탈트(gestalt)를 볼 것이다. 게쉬탈트라는

독일어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 단어는 배경과 형상 사이에 조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배경과 형상은 대립되지 않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선생님은 검은 칠판위에

하얀 백묵으로 글씨를 쓴다. 검은 색과 흰색은

상반된다.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그들은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검은 색은

검은색이고 흰색은 흰색은 흰색이다. 그들은

대립되는 양극이다. 그러나 선생님을 왜

 

검은 색 칠판에 하얀색 글씨를 쓰는 것일까?

하얀색 칠판위에 하얀색 글씨를 쓸수는 없는

것일까? 또는 검은 색 칠판위에 검은색 글씨를

 

쓸수는 없을까? 그렇게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용한 짓이다. 검은 색이라는

배경이 있어야만 흰색이 그 위에 형상을

 

이룰 수 있다. 그들은 대조된다. 그 사이에

긴장이 있다. 그들은 상반된다. 거기에 숨은

조화가 있다. 흰색을 검은 색 위에서 더 하얗게

 

보인다. 이것이 조화다. 하얀색 칠판위에서 하얀색

글씨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거기엔 긴장이 없기

때문이다. 대립되는 것이 없다.

 

유태인들이 예수를 처형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이 사건을 하나의 게쉬탈트로 만들었다. 십자가가

 

검은 칠판이 되었고 이 칠판위에서 예수는 더

하얗게 되었다.  처형당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가 남아있는 것은 십자가 때문이다.

예수는 붓다나 마하비라 보다 휠씬 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십자가 덕분이다. 세상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를 사랑한다.

십자가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색

칠판위에 쓰어진 흰색글씨다. 그러나 붓다는

 

하얀색 칠판위에 쓰여진 하얀색 글씨다. 거기엔

대조가 없다. 게쉬탈트가 형성되지 않는다.  배경과

형상이 똑같다.

 

                              헤라클레이토스 강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