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동물적 자아는 생활의 도구이다.

별관신사 2013. 6. 27. 05:40

동물적 자아는 생활의 도구이다.

이러한 이론을 가지고 논증(論證)하더라도 인간의 개인적 생존은
끊임없이 죽음으로 나가는 멸망의 길을 걷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그의
동물아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는 뚜렷하고 한점의 의심도 없는 진리를
사람의 눈으로부터 가리울 수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서 어린이가 되고, 나이 먹어 죽을 때까지 그의 개인적
존재가 최후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그치는 동물아의 끊임없는
소모(消耗)와 감소(減少)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 않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자아의 확대(擴大)와 불멸에 대한 염원(念願)을 포함하고 있는 개성 속의

생활 의식은 끊임없는 모순(矛盾)과 고통이 아닐 수 없고, 또 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생활의 유일(唯一)한 의의는 행복에 대한
희구인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던 동물적 자아의 행복을
부정해야 함을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다. 동물아의 행복을 부정함은
인간 생활의 법칙이다. 만약 이 법칙이 합리적 의식에 복종하는데
표현되면서도 자유로히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 의식은 각자 내부에서 그

동물아의 육체적 죽음에 즈음하여, 인간이 임종의 고통에 견디지 못해
오직 한가지 일, 즉 멸망되어 가는 개성의 괴로운 의식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 양식으로 옮김을 원할 때 강제적으로 실행될 것이다.

생활에의 첫걸음과 인간의 생활은 마치 주인에 의해서 외양간으로부터
끌려나와 마구(馬具)를 얹히는 말이 당하는 일과 같다. 외양간에서 끌려
나와 바깥 광경을 보고 자유로운 기분을 맛본 말로서는 이 자유야말로
생활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드나, 이윽고 수례를 매고 끌려나간다. 말은

자기 등에 무게를 느낀다. 그래서 만약 그 말이 자기의 생활은 자유로히
뛰어 다니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은 몸부림치기도 하고, 들어
눕기도 하고, 때로는 죽어 버리기조차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만약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로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따름이다. 그대로

걷고 짐을 끌고 간 결과 짐도 과히 무겁지 않고, 그것을 끌고가는 것이
고통이기는 커녕 도리어 기쁨임을 알던가 혹은 끝까지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면 주인은 그 말을 끌고 수레 위로 데리고 가서 밧줄로 벽에
동여맨다. 그러나 수레가 아래에서 빙빙 돌기 시작하므로 말은 암흑

속에서 제자리를 고통스럽게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그러나 말의 힘은
소용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말은 마음에 거슬리지만 자기의 일을
하고, 법칙은 그 속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오직
전자의 경우는 기꺼이 일하는데, 후자는 싫은 것을 억지로 일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인간인 내가 생명을 받기
위해서 그 행복을 거절해야 하다니!」하고 자기의 동물적 존재를 인생으로
알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실제 무엇 때문에 이 참된 생활의 표현을
방해하는 개성 의식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의 생명 및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정진하고 있는 동물이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은 비슷한 질문으로써 대답할
수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하고 그는 물을 것이다. 「이 물질과 그 법칙,
기계적이니 물리적이니 화학적이니 뭐니라고 하며 내가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뭇은 이유가 있을까? 만약 내 사명이?」하고
동물은 말할 것이다. 「동물생활의 존재라면 내가 정복해야 할 이러한
방해물은 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에게는 분명하지만 동물이 싸워서 그것을 동물로서의 개성 존속을
위해서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있는 모든 물질과 그 법칙은, 실은
장해(障害)가 아니고, 그들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저
물질의 개조(改造)와 그 법칙의 매개(媒介)에 의해서만이 동물은 살아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도 바로 이와 같다. 인간이 그 속에 자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의 합리적 의식에 종속시켜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동물적 자아는 결코 방해물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인간이 그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 있어서 그가 일하는데

쓰는 일개의 도구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게는 흙을 파기 위해서이고,
파서는 무디게 하고, 갈고, 소모하기 위해서 합리적 존재에 주어진
보상이며, 깨끗이 간직해두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생장을
위해서 그에게 주어진 재능이지 보존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무릇 그 목숨을 아끼는 자는 이것을 잃고, 나를 위해서 그 목숨을 잃은
자는 그것을 얻으리라.」 이 말씀 속에 있는 뜻은 우리들이 멸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또 쉴새없이 멸망하고 있는 것은 보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멸망하게 될 것, 또 멸망해야 할 것, 즉 우리들의 동물아를

부정함으로써만이 우리들은 우리의 참된 생명, 영구히 멸망하지 않고 또
멸망할 리 없는 생명을 받는 것이라 함이다. 더우기 우리들의 참된 생활은
그저 우리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아니었던 것, 또 생명일 수
없던 것, 즉 우리들의 동물적 생존은 생명이라 생각함을 그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도 나타나 있다. 더구나 거기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물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보상을 간직해 두는 따위 인간은 보상을 아꼈기
때문에 음식물도 목숨도 잃게 되리라 함도 말씀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