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의 가능성은 공간 및 시간에서의
그 출현 결과가 아니라 우리들 및 우리들이 연구하고
있는 사물에 종속하는 법칙의 통일 결과이다.
개(犬)가 괴로워하고 있다. 송아지는 유순하다. 그이는 나를 시랑
하고 있다. 새는 기뻐한다. 말은 겁먹고 있다. 착한 사람, 못된 짐승,
이와 같은 말만큼 알기 쉬운 무엇이 있을까? 더구나 이들이 가장
중요하고 이해하기 쉬운 모든 말은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이 종속되는 법칙이 우리들에게 이해 불가능하면
할수록 그 현상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더욱더 정확하게 결정되는
것이다. 지구나 달이나 태양의 운행을 일으키는 인력의 법칙을 누구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식(日食)은 공간으로서 가장
명확하게 결정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들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우리들이 생활과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희구(希求)와 이 행복을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이성(理性)
뿐이다. 그 다음 우리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동물아(動物我), 즉 행복을 희구하고 이성의 벌칙에 따르는 지식이다.
우리들의 동물아에 관한 지식은 이미 보이든가, 만져지든가, 관찰되든가
하지만 우리들의 이해에서 들어오기 어려운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이
부수(附隨)되고 있다. 확실성의 정도로 보아 이에 버금할 지식은 우리들과
같은 수많은 동물적 자아, 그 속에 우리에게 고통 되는 합리적 의식을
인정하는 동물적 자아에 관한 지식이 있다. 이들 자아의 생활이 행복에
대한 희구 및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의 법칙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우리들은 그것을 아는 것이 되며, 그것이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 속에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만큼 우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들은 인간을 가장 잘 알게 되는 셈이 된다. 확실성의
정도에 의해서 이에 버금할 지식은 동물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이다. 그
동물 속에 우리들은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 자신의 개성(個性)과 비슷한
개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과 비슷한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리들은 동물과는 이미 이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서로
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물 다음에 우리들은 식물을 본다. 식물에
이르러서는 우리들은 벌써 거기에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들과 비슷한
개성을 알 수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들 존재는 주로 우리들에게 시간 및
공간의 현상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들의 지식에는 더욱더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된다.
우리들이 그들을 앎은 그저 그들 속에 우리들이 동물아와 비슷한 개성을
보기 때문이고, 그것을 우리들의 경우와 같이 행복을 희구하고, 공간과
시간의 조건에서 그 속에 나타나는 이성의 법칙에 물질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한층 우리들의 지식에 들기 어려운 것은 무인격(無人格)인 물질적
사물이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이미 아무런 우리들의 개성과 비슷한 것도
찾아 볼 수 없고, 행복의 희구조차 전혀 보지 못하며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그들이 종속하는 이성 법칙의 시간적 공간적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들 지식의 진실성은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의 사물에 관한 관찰
여하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사물의
표현이 관찰하기 쉬우면 쉬울수록 그것은 우리 들에게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은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인식과 그 행복 달성을 위해서 우리들의 동물아를 이성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동물의
생활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그저 동물 속에서도 행복에 대한
희구와 그들에게는 유기체(有機體)의 법칙으로서 나타나있는 이성의
법칙에 좇을 필요를 인정하기 때문에 불과하다.
또 만약 우리들이 물질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그저 물질의 행복은
우리들에게 이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역시 그 물질 속에 우리들
자신이 있음과 같은 현상, 즉 그들을 지배하는 이성의 법칙에 따를 필요를
인정하기 때문에 불과하다.
지식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며, 이성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에 대한 희구라고 하는 우리들의 지식은 다른
사물로의 이전(移轉)이다.
동물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를 알 수는 없다. 그저
자기 속에 인정하고 있는 법칙에서만 우리들은 동물을 아는 것이다.
하물며 물질 현상에 이전된 자기의 생활 법칙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를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외계(外界)에 관해서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그가 그저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 속에 세계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관계를 발견하고
있으므로 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첫째는 합리적 의식의 관계, 둘째는
동물적 자아의 관계이며, 그 세계는 동물적 육체에 들어오는 물질의
관계이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이들 세 가지가 서로 다른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세계에서 보는 삼라만상은 그의 앞에 항상 서로
다른 세 가지 평면(平面) ① 합리적 존재 ② 동식물적 존재 ③
무생물이라는 배경법 (配景法) 속에 배치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 세계에서 이 세 가지 범주(範疇)를 보고 있으나, 그것은
그 자신 속에 이들 세 가지 지식의 대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① 동물을 지배하는 합리적 의식으로서 ② 합리적 의식에
따르는 동물로서, ③ 동물에 따르는 물질로서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시피 우리들이 유기체의 법칙을 알 수 있음은
물질 법칙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무엇보다 우선
우리들은 자기 자신, 즉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들의 개성을
종속시켜야 할 이성의 법칙을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때에 비로소 우리들에게는 자기의 동물적 자아 및 그와 비슷한 다른
자아의 법칙과 또 자기로부터 훨씬 멀리 있는 물질의 법칙을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자신만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 그것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들에게는 동물의 세계가 이미 우리들이 자신 속에 알고 있는
거의 반영(反映)이다. 물질의 세계에 이르러서는 이미 일종의 발명의
반영이라고나 말해야 할 것이다.
물질의 법칙이 우리들에게 특히 명료한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그저 우리들에게 똑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에게
똑같은 것은 우리들에게 의식되고 있는 우리들 생활의 법칙으로부터 특히
먼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법칙도 역시 우리들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먼 곳에서 우리들
생활의 법칙보다는 간단한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역시
우리들은 그저 법칙을 관찰할 따름이고 우리들이 이행해야 할 우리들의
의식적 법칙을 알다시피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 어느 쪽 존재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밖에 있는
것으로서 보고, 관찰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의 법칙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행복에 필요하고, 우리들은 이 의식에 의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들이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만약 세상에서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이 우리들의 동물아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처럼, 또 동물아(유기체)가 물질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처럼, 우리들이 합리적 의식을 종속시키는 더욱 높은 존재가 있기만
한다면, 이들 고등(高等) 존재야말로 우리들의 합리적 생활을 우리들이
자기의 동물적 존재나 혹은 물질적 존재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었음에
틀임 없다.
인생은 그것이 자기의 내부에 포함하고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 동물
및 식물(유기체)의 존재와 물질의 존재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참된 생활을 만들고 스스로 그 생활로 산다. 그러나
그 생활에 결합되어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에 인간은 참가할 수 없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물질은 그 자체가 단독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존재 양식은 마치 그의 생활에 삽입(揷入)된 앞선 과거의 생활
같은 것으로 또 과거 생활에 대한 추억 같은 것으로 인간에게 여겨진다.
인간의 참된 생활에 있어서 이들 두 가지 존재 양식은 그를 위해서
사업의 재료와 도구는 제공해 주나 사업 그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다.
자기 과업의 도구와 재료를 연구함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런 것들을
잘 알면 알수록 그의 과업은 쉽게 될 것이다. 그의 생활에 삽입된 이들
생존 양식, 즉 자기의 동물적 존재와 그 동물적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의
연구는 인간에게 마치 거울에 비친 반영처럼 일체의 존재물의 일반적
법칙, 이성이 법칙에 종속해야 하는 일을 가르치고, 그것에 의해서 그
동물아의 일체를 자기의 법칙에 따르게 해야할 필요성을 그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과업의 재료와 도구를 일 그 자체와
혼동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자기와 남에게서 관찰되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생활, 그의 노력없이 이루어지는 생활을 연구해본들 그 생활은 항상
그에게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찰에서 그는
결코 자기에게 의식되어 있지 않는 이 생활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이 신비스럽고도 항상 공간과 시간과의 무한 속에 그로부터 감춰져
있는 생활을 관찰함으로써는 그의 의식 속에 열려 있는 참된 자기의
생활을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게 하고, 그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 성립되는 참된 생활을 비추어 낼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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