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인간생활은 공간 및 시간 속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동물아를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행복의 희구로서 그 자신 내부의 생활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그 이외의 인생을 모른다. 또 알 수도 없다. 사실 인간은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그 자신의 법칙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최고
법칙에도 따르고 있을 때 비로소 동물을 살아있는 것으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질의 어떤 결합 속에 유기체의 최고 법칙에 대한 종속이 있을 때
우리들은 물질의 이 결합 속에서 생명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종속이
시작되어 있지 않든가 또는 끝마쳐 버렸을 때에는 이 물질을 다른 모든
물질, 즉 그 속에 기계적 화학적 물리적 법칙만이 작용되는 물질과 구별할
것은 없어지고 우리들은 거기에서 동물적 생명을 인정할 수도 없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자기 자신마저도
우리들의 동물아가 그 자체의 유기체 법칙뿐만 아니라 더욱 높은 합리적
의식의 법칙에 따를 경우에만 비로소 살아있는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성의 법칙에 대한 자아의 이와 같은 종속이 없어지자 곧 인간 속에
그를 구성하는 물질을 종속시키고 있는 자아의 법칙만이 작용하게 되고,
우리들은 다른 사람 속에도, 자기 자신 속에도, 인간 생활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그저 자체의 법칙에만 따르는 물질 속에
동물생활을 인정하지 않게 됨과 매한가지다.
무아몽중이라든가, 광증이라든가, 사고라든가, 만취라든가, 격정의
발작이라든가 하는 경우에 제 아무리 인간의 운동이 세고 신속한 것이라
한들 우리들은 그 사람을 산 인간으로 알지 않고, 또 생명 있는
인간으로서 대접하지 않고, 그의 내부에 그저 생명의 가능성만을
인정한다.
이에 반해서 그 사람이 아무리 약하고 활발치 못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동물적 자아가 이성에 따르고 있음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그를 생명 있는 인간으로 알고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인생을 이성의 법칙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으로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 있기는 하나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고, 그저 이성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생명을 시간적 및 공간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함은
사물의 높이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 길이나 넓이로서 함과 마찬가지다.
같은 평면이라도 움직이고 있는 물체가 위로 오르는 운동은 참된 인간적
생활과 동믈아의 생활과의 관계, 혹은 참된 생활과 시간적 내지 공간적
생활과의 관계와 흡사한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위로 향하는 물체의 운동은
평면에서의 그 운동에는 관계가 없으므로 그로부터는 아무런 증감을 받을
수가 없다. 인생의 결정도 이와 같은 것이다. 참된 생활은 항상 개성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개성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저것 개성의 존재에 의해서
증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 자아가 발견되는 시간적 내지 공간적 조건은 합리적
의식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 속에 성립되는 참된 생활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도 가질 수 없다.
자기 생존의 시간적 내지 공간적 운동을 폐기하고 정지시키는 것은
살기를 원하는 인간의 힘밖에 있다. 그러나 그의 참된 생활은 이들 눈에
보이는 공간적 내지 시간적 운동과는 관계없이 이성에 종속됨으로써
행복을 획득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이성에 종속함으로써 점점 많은
행복을 획득하는 일이어야만 인간생활을 구성하는 그것도 존재한다.
이러한 종속에서의 향상이 없을 경우에 인간생활은 공간 및 시간이라는 두
가지 눈에 보이는 방향에 따라서 나가는 단순한 일개의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향상 운동, 점점 도가 더해지는 이성으로의 이 종속
운동이 있을 경우에는, 두 개의 힘과 한 개의 힘 사이에 있는 관계가
결정되어, 인간의 생존을 생명의 영역에까지 높여 합치는 힘에 의해서
크든 적든 운동이 이루어진다.
공간적 내지 시간적인 힘은 인생의 관념에는 용납되지 않는 한정적
유한적(有限的)인 힘이다. 그러나 이성에 따름으로써 행복을 희구하는
힘은 향상력이며, 인생의 힘 그것이며, 이 힘에는 시간적 한도도 공간적
한도도 다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 생활이 정지되거나 분열되는 것 같이 여겨지나, 이같은
정체나 동요는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으며, 그것들은 그저 우리들이
인생을 보는 눈이 그릇되었을 때 그렇게 생각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야 인간은 참된 생활도 살기 시작했다. 즉 동물적 생활보다는 한층
높은 곳에 올라가 있다. 그 높은 곳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동물적 존재의 환영(幻影)을 보고 그 평면에서의
생존이 사방으로 심연(深淵)에 의하여 단절(斷絶)되어 있음을 본다.
더구나 이 향상을 인생 그 자체라고는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 높이에서
보이는 것 앞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그 높이까지
끌어올린 힘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자기 앞에 열린 방향에 따라나가는
대신에 향상되었으므로 자기 앞에 열린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달리도
아래로 내려와서 자기 앞에 놓인 절벽을 보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대로
낮게 내려오려고 한다. 그러나 합리적 의식의 힘은 그를 다시
들어올리므로 그는 그것을 보고 겁을 먹어 끝내는 그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땅 위에 엎드려버린다. 그리하여 이 한가지 일은 그가 마침내 그를
끌어당기고야 마는 멸망적 생활의 운동에 대한 공포로부터 살아나기
위해서는, 평면에서의 그의 운동, 즉 그의 시간적 공간적 존재가 그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과, 그의 생활은 오직 위로 향하는 운동 속에만
있으며, 행복과 생명의 가능도 역시 그의 개인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일에는 포함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함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그는 자기에게는 그 심연 위로 자기를
들어올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만약 이 날개가 없다면 자기는 결코
그토록 높이 올라갈 리도 없었을 것이며, 또 심연을 보는 일도 없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날개에 의지해서 날개가 그를 데리고 가는 곳으로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저 이 신뢰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참된 생활의 동요나, 그 정지나 의식의 분열이라는
현상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제한되는 동물적 존재에 있어서 자기의
생활을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만 합리적 의식은 동물적 생존 속에
나타난다는 식으로 생각된다. 자기 속에 인정되는 합리적 의식의 표시도
이런 식으로 보는 결과, 인간은 자기에게 이제 어떠한 조건하에서 자기의
합리적 의식이 자기 속에 나타났는가를 자문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과거를 연구한다 한들 그는 결코 합리적 의식이 출현한 시간을
찾아낼 수 없다. 그는 늘 그것은 결코 존재한 일이 없는 것이라든가, 혹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합리적 의식에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그저
그가 합리적 의식 생활을 생활로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자기의 생활을 오로지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제한하는 동물적 존재로서만
이해할 때, 인간은 합리적 의식의 각성이나 활동마저도 같은 척도로 재고
싶어한다. 그는 자문한다. 언제, 몇 시간쯤, 어떤 조건하에서 자기는
합리적 의식의 지배를 받았던가 라고, 그러나 합리적 생활의 각성과 각성
사이에 간격이 존재함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동물과의 생활로서 이해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만이다. 자기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합리적 의식의 활동에
있어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간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 생활은 존재한다. 오직 그 하나만이 존재한다. 그로서는 1
분간의 간격도 혹은 5 천년의 간격도 무차별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참된 생활 그것을 근본으로
인간이 일체의 다른 생활에 관한 이해를 스스로 꾸미는 것은 자기의
개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서 달성해야 할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이다. 이성도 그것에 대한 종속의 정도도 다같이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인간의 생활은 공간이나
시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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