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행복에 대한 희구, 즉 생활이다. 모든
사람들은 생활을 이렇게 이해하여 왔으며, 현재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장래도 항상 그렇게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인간적 행복에
대한 희구이며 인생이다. 그리하여 사색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이 그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릇된 과학은 인생의 정의에서 행복의 관념을 빼어버리고 인생을
하나의 동물적 생존 속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인생의
행복을 동물적 행복 속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대중의 미오와 일치하고
있다.
그 어느 경우도 이같은 과오는 과학의 소위 자아적 생존, 즉 개성을
합리적 의식과 혼동시키는 데서 생긴다. 합리적 의식은 그 속에 자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자아는 동물 및 동물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합리적
의식은 일개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이다.
동물은 그저 그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만이 생활할 수도 있다. 그 무엇도
그가 그러한 생활을 함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동물은 자기의 자아를
만족시키고 무의식적으로 그 종족에 봉사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개성임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성 있는 인간은 그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만이 살 수는 없다. 그가 그런 식으로 살 수 없음은 자기 개성을
알고 있고, 다른 존재도 역시 자기와 같이 개성이라는 것, 또 이러한
개성과 개성과의 관계에서 생겨야 할 모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그저 자기 일신의 행복에만 몰두하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자아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다른 존재도 역시 그 각각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동물이 알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틀임 없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자기는 자기의 주위에 있는 모든 개성이 희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희구하고 있는 개성임을 안다면, 인간은 이미 그의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악으로 비친 행복을 희구할 수 없게 되고, 또 그의
생활은 이미 개인적 행복을 바라는 것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저 인간은 때로 행복에 대한 자기의 희구가 동물과의 요구 만족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는 일이 있다.
이 잘못은 흔히, 사람이 자기의 동물아(動物我) 내부에 일어난 일을 그
합리적 의식의 활동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꿈에서 깨고난 뒤에도 꿈에서 본 바에 의해 지도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만약 이 잘못이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즉시
사람 내부에 자아와 합리적 의식의 혼동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의식이, 이 인간에게 항상 그의 동물아의 요구를
만족시킴은, 곧 그의 행복은 따라서 생활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고, 그의
참된 행복은 따라서 그에게 알맞는 생활, 즉 그의 동물아 속에는
지리(地理)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는 생활 쪽으로 계속 끌리는 것이다.
흔히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을 부정함은 당연한 일이며, 인간의
미덕이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말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행복을
부정함은 미덕도 아니고 위엄도 아니며, 오히려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인간은 자기를 전 세계에서 동떨어진 개인으로서 의식함과
동시에 다른 개인들도 세계로부터 동떨어진 한 개인으로서 인식하고, 그를
상호간의 연계(連繫)도 인정하고 자기의 개인적 행복의 덧없음을
인적하며, 그저 그의 합리적 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같은 행복에만
유일한 실존성을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동물에게는 자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따위, 자체의 행복에
직접 어긋나는 이와 같은 활동은 다름이 아니라 삶의 부정에 해당되나,
인간에게는 이것이 아주 정반대이다. 오로지 자기 한몸의 행복 달성에만
지향되는 인간의 활동은 인간 생활의 완전한 부정이다.
그 생존의 비참함과 유한함을 지시하는 합리적 의식을 갖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개체적 행복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개성의 종속이 계속
생활의 최고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아가 그저 그의 개인적
행복과는 일치되지는 않는 바, 그의 생활의 참된 행복이 그에게 보여주는
생존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개성의 의식은 인간에게 생활이 아니지만 그의 생활은 동물아의
행복과는 관계없고, 그에게 특유한 행복을 차차 획득해 나가는 활동 속에
이루어지는 그의 생활이 시작되는 한계점(限界點)이다.
오늘날 행세하는 인생관에 의하면, 인생이란 그 동물아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한 조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이 아니다.
그저 단순한 동물아로서 안간의 생존에 불과하다. 무릇 인생이란 동물적
생존 손에 조금 나타날 따름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마치 유기적 생물이
물질적 존재 속에 조금 나타날 뿐인 그 무엇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그의 개성의 목적이 그의 생활의 목적으로
생각된다. 이들 목적은 눈에 보이므로 이해하기 쉬운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런데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그에게 표시되는 목적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가해(不可解)한 것 같이 여겨진다. 그리고 인간은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물리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따르는 일이
두려운 것 같은 느낌이 일어난다.
세속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해독을 받은 사람에게는 현재 저절로
이행되고 있으며, 자기 위에도 타인 위에도 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동물아의 요구는 간단명료(簡單明瞭)한 것 같이 생각되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합리적 의식의 새로운 요구는 그것과는 서로 반대되는 것 같이
생각된다. 자연히 이루어짐이 아니라 애써서 해야하는 그 실천은 무엇인지
복잡하고 불명료한 것으로 여겨진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인생관을
저버리고 어렴풋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에 따르는 것은 두렵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기에게는 태어 나는 일이, 만약
그가 출생을 감득(感得)할 수 있다고 하면 두렵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했으리라고 생각됨과 매일반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인생관은 죽음으로
이끄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만이 생명을 주는 것이 명료할 경우 그
밖에 어찌한 도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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