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마음을 새롭게 하기

별관신사 2014. 5. 1. 04:50

어느 날 아침 나는 화장터로 실려 가는 주검을 보았습니다. 아주 빨간 천에 싸여 있었는데,
시신은 운구하는 산 사람 넷이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출렁거리더군요. 사람들은 주검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인간은 피폐하는지, 혹시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이

있는지요? 새 차를 사서 몇 년 쓰다 보면 헌 차가 됩니다. 육체도 낡습니다. 그렇다면 내친 김에
왜 마음도 피폐하는지 물어봅시다. 조만간에 육체에는 죽음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습니다. 몸은, 우리가 끊임없이 쓰니까, 기관이 낡아져서 피폐합니다. 질병,

사고, 나이, 나쁜 음식, 나쁜 유전 형질 - 이 모든 것이 육체를 피폐하게 하고 죽이는
요인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왜 피폐합니까? 늙고, 무거워지고 둔해지는 것입니까?
시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우리 육체가 죽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마음은 왜 피폐합니까? 이런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습니까? 마음도 '피폐'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은 물론 젊은이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통해 마음이 어떻게
둔해지고 무거워지는가를 압니다. 만일에 마음이 이렇게 피폐해지는 까닭을 알면, 미리 방지할

수있을 텐데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끝나지 않는 삶, 시간에매이지 않는 삶, 부패하지 않는 삶, 강가 층층다리로 실려 가 불에 그을리고, 남은 것은 강으로버려지는 육체같이 썩지는 않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 왜 마음이 피폐할까요?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젊을 때의 우리 마음은
산뜻하고, 열의가 있고,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모 때문에, 사회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미 둔해지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여러분은 왜 별이 빛나는지, 왜 새가 죽는지, 왜 나뭇잎이

떨어지는지, 제트기가 어떻게 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묻거나, 알고 싶어하는 이 활기찬 충동은 곧 짓눌리고 맙니다. 공포에 짓눌리고,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고, 인생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것과 맞설 수 없는 우리의 무능에 짓눌립니다.

여러분도 익히 보았을 테지요? 여러분의 열의가 얼마나 쉽게, 나무라는 한 마디 말, 하지 말라는몸짓, 시험의 공포, 부모의 위협 앞에서 무참하게 부서지는가를. 이것은 우리의 감성이 이미
옆으로 밀렸고, 우리 마음이 이미 둔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 마음을 둔화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은 모방입니다. 여러분은 전통에 의해 모방하게끔
되어있습니다. 과거의 무게가 여러분을 어떤 양식에 길들이고 순응하게 합니다. 이 순응을 통해
마음은 안도감을 느낍니다. 이 순응하는 습관은 윤활유를 듬뿍 칠한 구멍과 같습니다. 걸림이

없이, 한 점 의혹이 없이 우리를 드나들게 해 주니까요. 주위에 있는 어른들을 관찰해 보세요.
그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죽음의 평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그들이 바라는
평화와는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자, 마음이 그 구멍 안에, 틀 안에 안주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이 구멍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구멍 안에 들어앉은 사람이 이상을 따르고 전례를 따르고
구루를 따르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모방합니다. 역사책에서 위대한 지도자, 성자, 장군에 대한 글을 읽으면, 어떻습니까,
그들의 삶을 본뜨고 싶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본뜨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본능은 위대한 사람들을 본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피폐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그러면서 마음은
스스로를 틀 안으로 가두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회는 깨어 있는 사람, 예리한 사람, 혁명적인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틀을 부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여러분의 마음을 틀 안에 가두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른바 교육이 모방하라고,
따르라고, 순응하라고 여러분을 꼬드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은 모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말하자면, 습관 만드는 것을 그만둘 수 있을까요? 늘
습관에 갇혀 있는 마음이 이 습관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요? 마음은 습관의 결과가
아닐까요? 마음은 전통의 결과, 시간, 즉 과거의 반복과 연속이라는 의미에서 시간의 결과입니
다.

그렇다면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 -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투사되어 있는 미래의 일까지 - 에 대한 생각을 없애 버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은
습관에서, 그리고 습관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새로운
틀,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내지 않고, 다시 모방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새롭게 한다면,
늘 싱싱하고 젊고 순수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영원히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모아들이는 과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만드는 것, 모방하는 것은 모아들이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긁어모으고
있을 때, 여기에 피폐가 따르고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긁어들이지 않는 마음, 모아들이지 않

는마음은 매일, 매순간마다 죽습니다. 이런 마음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끝없이 빈 상태가 바로 이런마음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 긁어들인 모든 것에 대해서, 모든 습관, 모방한 가치관,평화를 위해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죽은 마음은 저 스스로

의생각이라는 그물에 갇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과거에 대해 죽음으로써 마음은 산뜻해집니다.따라서 이런 마음은 피폐하지도 않고, 죽음의 파도에 휩쓸리는 일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