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욕망이라는 것은 욕망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바를 성취시키는
데는 왜 늘 장애가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어떤 일에 대한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할 때, 만일 결과에도 성취에도
집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의 전존재가 여기에 투입된다면 -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 장애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하지 못할 때,
욕망 자체에 갈등이 있을 때, 여기에 장애가 있고 모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일을 두려워하는 상태, 이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말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인지 분명히 자각하고 있습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내가 설명할 테니 잘
들으세요.
인간과 인간의 집단적인 관계인 사회는 여러분이 완전한 욕망을 갖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욕망을 가질 때 여러분은 사회의 골칫거리, 위험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야심이나 질투 같은 것 정도는 사회도 허용합니다. 있어 봐야 별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회라는 것은 질투하는 사람, 야심 만만한 사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모방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질투, 야심, 믿음, 모방 따위를 용인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다름이 아니라도 사회는 그대로 용인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기존 사회의
틀에 맞으면 여러분은 훌륭한 시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해지는 순간 이
완전한 욕망은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로 보아서는 여러분은 위험한
존재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회는 여러분이 완전한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막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은 여러분 전존재의 표현에 다름 아니고, 따라서 혁명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는 행위는 무엇무엇이 된다는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존재하는 행위는 혁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를 거부합니다. 대신 사회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회의 틀에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심의 한
형태로서, 어떤 상태가 되려는 행위로 나타나는 욕망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조만간 꺾이고,
막히고,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나쁜 짓을 해서라도 여기에
저항합니다.
이것은 함께 따져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여러분 역시, 욕망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성취에는 늘
좌절의 그림자가 따릅니다. 좌절하는 여러분의 가슴에 깃드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절규입니다.
어떤 상태가 되려는 욕망 - 위대한 사람, 위대한 성자, 위대한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려는 욕망
-에는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취될 리 없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늘 고통과, 비애와, 전쟁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와질 때, 행동이 전혀 달라지는,말하자면 존재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내가 빈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상태는 시간
을초월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른 사람은 성취와 전혀 상관없이 사고합니다. 이런 상태
자체가 곧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데는 왜 늘 장애가 있습니까?
크리슈나무르티: 어떤 일에 대한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할 때, 만일 결과에도 성취에도
집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분의 전존재가 여기에 투입된다면 - 여러분에게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 장애 같은 것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하지 못할 때,
욕망 자체에 갈등이 있을 때, 여기에 장애가 있고 모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일을 두려워하는 상태, 이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저 일을
하고 싶어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정말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인지 분명히 자각하고 있습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내가 설명할 테니 잘
들으세요.
인간과 인간의 집단적인 관계인 사회는 여러분이 완전한 욕망을 갖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욕망을 가질 때 여러분은 사회의 골칫거리, 위험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야심이나 질투 같은 것 정도는 사회도 허용합니다. 있어 봐야 별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회라는 것은 질투하는 사람, 야심 만만한 사람, 무엇을 믿고 무엇을 모방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질투, 야심, 믿음, 모방 따위를 용인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다름이 아니라도 사회는 그대로 용인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기존 사회의
틀에 맞으면 여러분은 훌륭한 시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욕망이 완전해지는 순간 이
완전한 욕망은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로 보아서는 여러분은 위험한
존재로 변합니다. 그래서 사회는 여러분이 완전한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막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은 여러분 전존재의 표현에 다름 아니고, 따라서 혁명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는 행위는 무엇무엇이 된다는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존재하는 행위는 혁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이를 거부합니다. 대신 사회가 좋아하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사회의 틀에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심의 한
형태로서, 어떤 상태가 되려는 행위로 나타나는 욕망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조만간 꺾이고,
막히고,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나쁜 짓을 해서라도 여기에
저항합니다.
이것은 함께 따져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이를 먹으면 여러분 역시, 욕망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의 성취에는 늘
좌절의 그림자가 따릅니다. 좌절하는 여러분의 가슴에 깃드는 것은 노래가 아니라 절규입니다.
어떤 상태가 되려는 욕망 - 위대한 사람, 위대한 성자, 위대한 이것 아니면 저것이 되려는 욕망
-에는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취될 리 없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늘 고통과, 비애와, 전쟁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가 되려는 욕망에서 자유로와질 때, 행동이 전혀 달라지는,말하자면 존재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내가 빈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상태는 시간
을초월해서 존재합니다. 이런 상태에 이른 사람은 성취와 전혀 상관없이 사고합니다. 이런 상태
자체가 곧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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