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곤경의 뿌리는 대극을 화해 불가능한
것으로 서로 철저하게 분리된 것으로 보는
우리의 경향에 있다.
예컨데 우리는 사고 파는 것과 같은 가장
단순한 대극조차 서로 분리된 두 개의 다른
사건(event)으로 본다.
물론 사는 행위와 파는 행위는 어떤 점에선
다른것이긴 하다. 하지 그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결코 분리할 수 없는것이라는 사실이 중요
하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살 때는 언제나
누군가가 다른 무언가를 판다.
즉 사는 행위와 파는 행위는 단지 한 사건의
양극 즉 단일한 사건을 나타내는 사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극의 차이점이 아무리 생생
하더라도 그 양극들은 어느쪽도 다른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 존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 밖없는 안, 아래없는 위,
패배없는 승리, 고통없는 쾌락, 죽음없는 생명,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와 아니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과 악은 그 거리가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두려워 한다고 나도 두려워 해야만 할까?
이 무슨 난센스인가?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여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전제로 성립하며
길고 짧음은 상대를 드러내 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대며
앞면과 뒷면은 서로 따라 다닌다.
고로 올음의 한 짝인 그름이 없는 옮음을 말하거나
선정(善政)짝인 악정(惡政)없는 선정만을 말하는
것은 우주의 위대한 원리를 모르며 뭇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땅의 존재없이 하늘의 존재를
말하거나 양없는 음의 원리를 말하기도 하나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말을 되풀이 한다.
그와같은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거나
무뢰한임이 틀림없으리라.
캔 월버의 무경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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