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 가르침의 시작인 고대의 족첸
탄트라는 이미 완전히 자란 모습으로
태어나는 가루다라고 하는 신비로운
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 새의 이미지는
이미 완전무결한 생태의 우리의 원초적인
본성을 상징한다. 가루다의 새끼는 알
속에 있을 때 이미 완전한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껍질을 깨고 나오지 전에는
결코 날 수 없다. 단지 껍질이 깨어져
활짝 열려야만 가루다는 하늘 높이 치솟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성의 참모습은
우리 몸으로 가려져 있으며 우리가 이 몸을
버리는 순간 밝게 현현한다고 스승은
우리들에게 말한다. 죽음의 순간이 그렇게
엄청난 기회인 이유는 바로 그때 마음의
근원인 본성 근원적인 광명 또는 밝은 빛이
자연스럽게 방대하고 눈부시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가
근원적 광명을 알아차릴수만 있다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영적
수행을 통해 마음의 본성에 정통해지고
진정으로 친숙해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다소 놀랍게도 티베트에서 죽음의 순간에
깨달은 사람은 지금 이 삶에서 깨달은
사람이지 죽은 이후 바르도 상태에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밝은 빛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확립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삶에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정말로 알아야 하는
결정적인 부분이다.
티베트의 지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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