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그 속에서 키워지고 또 지탱되어 온 교의, 즉 인생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동물적 존재로서 보는 그릇된 교의에서만 사람들이
자기 내부에 합리적 의식의 깨우침을 느끼고 곧 들어오는 괴로움이 분열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오(迷誤)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활이 그 내부에서 두
갈래가 난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은 그의 생활이 하나임을 알고 있으나, 그것이 둘인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은 손가락 두 개를 묶고 그 사이에 작은 공을 굴릴
때 공이 하나인 줄 알면서도 두 개인 것 같이 느끼는 것이다. 그것과도
같이 그릇된 인생관을 지닌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인간의 이성은 그릇된 방향으로 지향되어 있다. 그는 도저히 인생일 수
없는 자기 하나의 육체적 개인적 존재를 인생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쳐 온
것이다.
그는 이같이 상상된 생활에 관한 그릇된 관념으로서 인생을
바라보면서는 거기에서 두 개의 인생을 찾으려했다. 자신이 상상한 인생과
실제 존재하는 인생을.
그러한 사람에게는, 합리적 의식에 의한 개인적 존재의 행복이나 다른
행복의 요구 따위는 어떤 병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합리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개인적 행복 및 생활의 가능을
부정함은 개인적 생활의 약속에 의한 필연적인 귀결이며, 그것과 결부된
합리적 의식의 본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다. 개인적 행복 및 생활의
부정은, 합리적 생존에 대해서는 마치 새가 날개로 나는 것이 발로
걷기보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 생명의 자연적인 본질이다. 만약 깃털이
나기 시작한 아기 새가 발로 뛴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것이 그
새의 본질이 아니라는 증명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우리들이 자기 이외에서
인생이란 개인적 행복에 있다고 생각하는 깨우치지 못한 사람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증명으로 되지는 못한다. 인간이 그에게 본질적인 참된 생명을
깨우치게 함은,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이토록 긴장을 요구하게 된 것이
오로지 지금 이 세상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삶의 환영을 삶 그것이라고
하며, 참된 생활의 출현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참된 생활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여자로서의 본성에 관해서 무지했던 처녀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性)의 성숙의 조짐을 느끼는 그러한 처녀는 자기를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기쁨을 가진 장래의 가정생활 쪽으로 이끌어 가는 그
상태를 절망으로 이끄는 병적인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와 비슷한 절망을 오늘날의 세계 사람들은 참된 인간생활에 대한
깨우침의 처음 징조에 부딪침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이 깨우쳐져 있는데도 아직 자기의 생활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물질의 운동을 그의 생활로 인정하고는
개성으로서의 그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일어나는 물질적 법칙에 그를 종속시키는 것에만 그의 생활을 발견하는
짐승이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괴롭고 번거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짐승은 괴로운 내적 모순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저 단순한 물질적 법칙에 자기를 종속시키는 나머지 자기의 생활을
드러누워서 숨쉬는 일에서 찾아볼 것이다. 그러나 개성은 그와는 한층
다른 일―자신의 보육과 종속의 보존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짐승에게는 자기가 분열과 모순을 느끼고 있듯이 느낄
것이다.「생활이란」하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중력의 법칙에 따르는 일,
즉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체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따르는 일에
있다. 나는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 한편으로 나는 일해야 하고 먹어야
하며 또 수컷이든 암컷이든 찾아야 한다.」
동물은 그러한 상태에서 괴로워하고 거기에서 번거로운 모순과 분열을
볼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자기 생활의 낮은 법칙, 동물적 개성을 자기
생활의 법칙으로 인정하도록 가르쳐 온 인간에게도 생기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 법칙, 그의 합리적 의식의 법칙은 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를 에워싼 모든 생활과 그릇된 가르침이 그의 그릇된 의식 속에
그를 억류하고 있으므로 그는 모순과 분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이 그 괴로움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법칙으로서
물질의 낮은 법칙이 아니라 그의 개성의 법칙을 인정하여 그 법칙을
실행하면서, 그의 개성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물질의 법칙을 이용하여야
함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역시 자기의 생활을 개성의 낮은 법칙 속에서가
아니라 최초의 법칙을 포함하는 최고 법칙 속에―그의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그에게 제시된 법칙 속에―인정하도록 해야한다. 그렇게 되면
모순은 사라지고 개성은 자유로이 합리적 의식을 쫓아 그것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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