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인생에서의 참된 생활의 탄생

별관신사 2013. 6. 23. 04:18

인생에서의 참된 생활의 탄생
생명의 구현(具現)을 인간적 존재 속에서 관찰하고 시간 속에서
음미(吟味)할 때, 우리들은 참된 생명이 마치 낱알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 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일정한 시기에 표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참된 생명의 구현은 동물적 개성이 사람을 행복 쪽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할 때, 합리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함을 가르쳐 다른
행복을 지시하는 일 속에 구성된다. 인간은 이 멀리 지시된 행복을
응시하기는 하나 그것을 인식할 만한 힘이 없어서 처음에는 이 행복을

믿지 않고 본래의 개인적 행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처럼 희미하게
자기의 행복을 지시하는 합리적 의식도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을 지시함에
있어서는 아주 뚜렷하고 단정적이므로 인간은 또 다시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고, 새삼스러이 그에게 지시된 이 새로운 행복을 응시한다. 합리적

행복은 아직 보이지 않으나, 개인적 행복이 이토록 여지없이
폐기(廢棄)되고 보면, 그 이상 개인적 행복을 지속해 나가기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이하여 인간의 내부에는 합리적 의식에 대한
동물아(動物我)의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참된 인간적 생활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물질계에서 모든 것이 생길 때 일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태아(胎兒)가 태어나옴은 그가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완전히 발육해서 그때까지 해오던 생존을 그 이상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하지만 새로운 생활이 그를 부르지
아니한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생존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식은 그의 개성 속에서 어느덧 발달되어 마침내는 개성 속의
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의 출생에 즈음하여 일어남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생활 이전의 형태인 낱알의 해체와 새로운 움의 싹트기가
해체되는 낱알이라는 앞선 형태의 의견상의 투쟁과, 튼 움의 성장 및
해체되는 낱알을 토대로 하는 움의 배양(培養) 등 모두 같은 현상이다.

합리적 의식의 출생과 눈에 보이는 육체의 출생과의 차이는 우리들에게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즉 육체 출생에 있어서 우리들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사이에 언제, 어떻게 해서, 무엇에서, 즉 배자(胚子)에 무엇이
생겨나는가 함을 목격해서 씨앗, 즉 열매이며, 일정한 조건하의 씨앗에서

식물이 발생하고, 그것이 꽃이 피고, 마침내는 씨앗과 같은 과일이 열매를
맺음을 (이와 같이하여 생명의 모든 순환이 우리들의 눈 앞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알 수 있으나 합리적 의식의 성장은 시간적으로 볼 수 없으며, 그
순환 과정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합리적 의식의 성장과

그 순환을 볼 수 없음은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의 생명은 이 우리들 자신 속에서 생겨 나와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의 출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들은 도저히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새로운 생존의 출생, 동물적 의식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새로운 관계를 볼 수 없음은 마치 씨앗이 그 줄기의 생장을 볼 수 없음과
마찬가지다. 합리적 의식이 숨은 생태로부터 나와서 우리들 자신의 앞에
나타날 때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자신이 모순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에 아무런 모순이 없음은 움트는 씨앗에 모순이
없음과 같은 것이다. 움트는 씨앗에 있어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씨앗의
껍질에 있었던 생명이 이제야 그 움속에 있음을 볼 따름이다. 합리적
의식을 깨우친 사람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있을

리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새로운 존재의 출생, 동물적 의식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새로운 관계의 발생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다른 개성이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향락(享樂)이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죽을 것도 알지 못하며
생존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므로 자연히 아무런 모순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다른 개성도 자신과 마찬가지이며, 고통이 그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과 생존이란 완전한 죽음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면, 그리고 그의
합리적 의식이 그의 개성의 존재를 해체시키기 시작한다면, 그는 이미
해체하기 시작한 그 개성 속에 자기의 생명을 맡길 수 없게 되어

필연적으로 그것을 자신 앞에 전개된 새로운 생명 속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모순이 없음은 마치 이미 싹이 텄으므로 그
자체는 해체되는 씨앗에 모순이 없음과 매일반인 것이다.

이성(理性)이란 인간에 의하여 인정된 법칙이며,
인생은 그것에 의하여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동물적 개인에 대한 합리적 의식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 개인의 행복이 부정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적 개인의 행복에 대한 부정은 합리적 의식이 깨우쳐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합리적 의식이란 무엇인가? 요한 복음서에는 그 첫
페이지에서 로고스(로고스라 함은 이성 예지를 뜻한다)는 태초(太初)라고
했다. 이어 말하기를 일체는 그 속에 있으면, 일체는 그것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성은―다른 모든 것을 정의하는 것―다른 것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글로부터 시작되어 있다.

이성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들은 그것을 정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을 뿐더러, 그저 그것 하나
밖에는 알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로 접촉할 때 우선
우리들이 믿게 될 것은―그 무엇에 있어서보다도 더 많이―일반 적인 이

이성이 우리들 모두에 대한 똑같은 필연성이다. 우리들은 이성이야말로
우리들 살아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는 유일한 토대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성이야말로 우리들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히 또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이 우리들에게 똑똑히 알려져 있는 이 이성의 법칙과 합치된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으므로 해서 알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은 이성을
알고 있다. 또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다.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이성이란, 즉 합리적 존재인 인간이 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좇아야 할 법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에 의하여
그 생활을 완성시키는 법칙이다. 동물에게는 그들이 그것에 의하여
생육하고 번식하는 법칙과 같은 법칙이며, 식물에게는 초목이 그것에

의하여 성장하고 꽃이 피는 법칙과 같은 법칙이며, 천체(天體)에게는
지구나 발광체(發光體)가 그것에 의해서 운행되는 법칙과 같은 법칙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신 속에서 우리들의 생활 법칙으로서 아는 법칙은
세계의 온갖 외적 현상이 그것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법칙이고, 그 저 다른

점은 우리들 자신 내부에서는 이 법칙을 우리들 자신이 성취해야 할
것으로서 인정하고 있으나, 일반 외적 현상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관여없이
이 법칙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으로서 인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이
세계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일은 그저 우리들에게 보이는, 우리들

이외의 천체에 있어서 동물계 식물계 기타 전 세계에서 행해지는 이성에
대한 복종뿐이다. 외부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들은 이성의 법칙에 대한
복종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우리들은 이 법칙을 자신이
행해야 할 것으로서 시인하는 것이다.

흔히 있는 인생에 관한 미오(迷誤)는 자신의 법칙에 대한 우리들의
동물적인 육체의 복종, 우리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에
의해서 하여지는데 불과한 복종, 그것을 보고 인생인 것처럼 사고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이 결부되어 있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의 법칙은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 내에 있어서 그것이
나무나 결정체(結晶體) 전체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무의식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우리들의 동물적인 육체를 이성에 복종시키는 일―은 우리들이

어디에서도 못 보는 또 볼 수도 없는 법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성취되어 있지도 않고, 결국 우리들에 의해서 우리들 생활 속에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을 실행하는 일, 즉 행복 달성을 위해서
자신의 동물아를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일 속에 우리들의 생활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복과 생명이 자기의 동물적 자아(自我)의
존재와 행복을 인생 전부로 보고 우리들에게 예정된 인생의 과업을 거절할
때 우리들은 참된 행복과 참된 생명을 스스로 저버리고 그 대신
우리들과는 관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들의 생활로 될 수 없는 눈에
보이는 동물적 활동의 존재를 설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