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그릇된 방향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 위에 작용하는 법칙을
우리들의 삶의 법칙이라고 하는 미오는 사람들이 항상 빠져왔으며, 현재도
역시 빠지고 있는 옛적부터 있는 미오다. 이 미오는 사람들에게 그들
지식의 주요한 목적, 인생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물적 자아를
이성에 복종시키는 것을 감추고 그 대신 인생의 행복과는 관계없이 인간
존재의 연구를 내놓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 달성을 위해서 인간의 동물아를 복종시켜야 할 법칙을
연구하고 이 법칙을 알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세상의 다른 삼라만상을
연구하는 대신에, 그릇된 지식을 그 노력을 그저 지식의 주요 목적―참된
생활의 행복 달성을 위해서 인간의 동물적 자아를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이 동물아의 존재나 행복의
연구에만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릇된 지식은 이 지식의 주요 목적을 제쳐놓고 그 힘을 과거 및 현재
사람들의 동물적 존재의 연구와 일반적으로 동물로서의 인간 생존의
상황(狀況) 연구에 돌리고 있다. 그런 인간에게는 이러한 인간 생활의
행복에 대한 지침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릇된 지식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존재해 온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그 존재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가, 그리고 그 변화는
어떠한 방향으로 지향되고 있는가. 그들 존재의 이러한 역사적 변화로부터
우리들은 그들 생활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식의 주된 목적―인간의 개성이 그 행복을 위해서 마땅히 쫓아야할
합리적 법칙의 연구를 도외시하면서 이와 같은 부류의 소위 학자들은 그
연구의 목표로서 자신이 설치한 목적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연구가
무익하다 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존재가 그저 그들의
동물적 존재의 일반적 법칙에 의해서만이 변하는 것이라면 그 존재가
가만히 있더라도 이토록 종속하고 있는 법칙을 연구함은 전혀 무익하며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 존재 변화의 법칙에 관해서 사람들이 알건 말건
간에 이 법칙은 두더지나 수달피의 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동물들이
지배받고 있는 조건에 따라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그 생활을 존속시켜야 할 합법적 법칙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이성법칙의 지식은 그 법칙이 그에게 열리는 곳,
즉 그 합리적 의식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음은 뚜렷한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생존해 왔느냐를 아무리
연구한다 한들, 인간의 생존에 관해서 이 지식이 없더라도 인간 내부에서
자연히 일어날 그러한 것 이외에는 결코 그 어느 하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아무리 인간의 동물적 존재를 연구한다 한들 인간이 그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이 동물적 존재를 종속시켜야할 법칙을 알 리도 또
결코 알 수 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즉 사학(史學)이니 정치이나 하고 불리우는 인생에 관한
무의미한 인간적 고찰의 일종이다.
더우기 오늘날 지식이 극도로 유포되어 지식의 유일한 목적을 완전히
잃고 있는 고찰의 다른 범주(範疇)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을 관찰의
대상으로 연구하면서 우리들이 보는 바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도 역시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영양을 취하고, 생장하고, 번식하고,
늙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현상, 즉 정신적인 (그들은 그것을
이렇게 이름 붙이고 있다) 현상이 있고, 그것이 관찰의 정확(正確)을
방해하며 너무도 큰 복잡성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생활을 보다 더 많은 간단한 현상, 즉 우리들이 늘
이 정신적 활동이 없는 동식물에서 보는 것 같은 현상을 연구하여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동물 및 식물의 생활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식물을 연구해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전체 속에
전반에 공통되어 있는 한층 더 간단한 물질의 법칙이 나타나 있는 일 그
하나 뿐이다.
그리하여 동물의 법칙은 인간생활의 그것보다 간단하고 식물의 법칙은
더욱더 간단하며 물질의 법칙은 한층 더 간단하므로 우리들의 연구는 그
기초를 가장 단단한 법칙인 물질의 법칙에 두어야 한다. 우리들은 식물 및
동물 속에 일어나는 현상이 틀림없이 인간의 내부에도 생기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렇게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간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우리들에게 보이고 우리들의 실험에 맡겨져 있는
가장 간단한 무생물에 생기는 현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물며 인간 활동의 모든 특성이 물질 속에 작용하고 있는 힘과
항상 끊임없는 관련을 가지고 있음에 있어서랴!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변화는 모두 그의 활동을
변화시키고 또 파괴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물질의 법칙은 인간 활동의 근저라고. 그러나 인간 속에는 우리들이
동물에서도, 식물에서도, 무생물에서도, 볼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고찰,
그것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목적이며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은
무익하다는 고찰이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에는, 만약 인체에서의 물질의 변화가 그의 활동을 파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물질의 변화가 인간의 활동을 파괴하는
원인 중의 하나라 함을 증명하는데 그치고, 물질의 운동이 좀처럼 인간
활동의 원인이라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식물의 뿌리에서 흙을 없애버리는 해독이 흙은 반드시
아무데라도 있다고 할 수 없는 증명으로는 될 수 있으나, 식물은 흙만의
산물이라는 증명으로는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생활의 법칙에 수반되는 현상의 법칙을 밝히기만 하면 인간 생활 그
자체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생물 속과 식물 속, 동물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을 인간에게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생활, 즉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그 동물적 자아를 복종시켜야 하는
법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인간 생활을 보지 않고 역사적 존재를
연구하기도 하며, 그저 눈에 보일 뿐, 인간에게 의식되지 않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물질의 여러 가지 법칙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곤 한다. 즉
그들은 그들이 추구해야할 뚜렷하지 못한 목적을 찾으려고 저들이 잘
모르는 사물의 상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해온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에서의 인간 생존의 현상을 아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교훈적이라는
것, 또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동물적 자아 및 다른 동물의 법칙을
연구하는 일도 우리들에게 교훈적이 될 수 있다면, 물질 그 자체가
종속하고 있는 법칙의 연구도 역시 교훈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이다. 이들 모든 연구가 인간에게는, 그의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일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보여줌으로써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성취되어서 우리들 눈에 보이고 있는 일에 관한 지식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지식과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들의 동물아를 종속시켜야 할
법칙에 관한 지식을 우리들에게 줄 수 없음은 명백하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법칙의 지식은 우리들에게 교훈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동물적 자아를 종속시켜야 할 이성의 법칙을 인식할 경우에만 그런
것이고, 이 법칙이 전혀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나무가 제아무리 그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내지 물리학적 현상의
일체를 연구한들(가령 나무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치고) 나무는 자기를
위해서 이러한 관찰로부터 나무 즙을 모아서 그것을 줄기나 잎 열매의
성장을 위해서 분배해야 할 필연성을 끄집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도 이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그 동물적 자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안다 한들 그러한 법칙은 그의
수중에 있는 한 조각의 빵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 가이다. 아내에게 줄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인가? 개에게 줄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신이
먹을 것인가? 또 혹은 간직해 둘 것인가? 구걸하는 자에게 줄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리 지시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생활은 그저 이와
유사한 문제의 해결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물 식물 및 물질의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의 연구는 인생의 법칙을
해명하는데 유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없어서는 안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연구가 그 목적으로서 인간의 지식의 주요한 목표이다.
이것은 이성 법칙의 해명(解明)을 가질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인간의 생활이, 단순히 그 동물적 생존에 불과한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표시되는 행복이란 있을 리 없다. 이성의 법칙이란 결국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정에 입각한다면, 이러한 연구는 단순히
무의미할 뿐더러, 인간의 눈에서 그 지식의 유일한 목표를 감추고, 그로
하여금 사물의 반영만을 연구한다면 그 본체도 알 수 있다는 미오에
빠뜨리게 함으로써 해로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마치
생물의 운동 원인이 그 그림자의 변화와 운동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생물의 그림자의 변화나 운동만을 꼬박꼬박 연구하는 사람의
행동에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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