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까지 감옥 안에서 저항하는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어 왔습니다. 개혁가들,
이상주의자들, 그리고 구체적인 결과를 겨누고 부지런히 뛰는 다른 여러 사람들이 길들어 온 틀
안에서, 그들 자신의 사회 구조라는 벽안에서, 다수의 집단 의지가 표현된 문명의 문화적 틀
안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자신감이 무엇인지 자신감이라는 건
어떨 때 생기는 것인지 살펴볼 차례가 된 듯 합니다.
자신감은 주도적인 행위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나 어떤 틀 안에서의 주도적인 행위는 자기
과신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자기 과신은, 자기가 개재하지 않는 자신감과는 달라도 크게
다릅니다. 자신감을 갖는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손수 어떤 일을 한다면, 가령손수 나무를 심어서, 그 자라는 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혹은 나이가 들어 마
을에다리를 놓아준다거나 공직에서 행정적인 수완을 발휘했을 때 여러분은 그런 일이면 얼마든지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아는 자신감은 모두,
감옥, 사회-공산주의 사회든, 힌두교, 혹은 기독교 사회든-가 우리 주위에다 친 울타리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주도권도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여러분은 이 감옥 안에서의 자신감으로도 자동차를 설계할 수 있고 좋은 회사, 훌륭한과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 안에서 사회 구조를 계승하고, 개혁하고, 빛이
되고, 감옥의 내부 장식이나 하는 이런 종류의 자신감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 과신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면,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느낍니다. 반면에 연구와 이해를 통해 여러분이 속한 사회 구조에서 이탈하려 할 때, 여기에서
는진짜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자기 과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양자의차이-자기 과신과, 자기가 빠진 자신감의 차이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삶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드민턴이나 크리켓이나 축구 같은 운동을 잘 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이런 운동에 자신감을
갖지요? 이때의 자신감은, 이런 운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것임을 예감하게 됩니다. 수학
문제를 빨리 풀 수 있다면 이 능력 역시 여러분에게 자기 확신을 줍니다. 사회 구조 안에서의
행동에 자신을 느낄 때, 여기에는 늘 기묘한 교만 같은 게 끼어들지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멋진 결과를 달성해 낼 수 있는 사람의 자신감에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교만과,
하는 사람은 나라는 느낌이 묻어 다닙니다. 따라서 어떤 결과를 가능케 하는 그 행위자체, 감옥
안에서의 사회를 개혁하는 그 행위 자체에는 늘 행위자 자신의 교만, 즉 내가 그일을 해 내었고,
내 이상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며, 내가 속한 무리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느낌이
묻어 다닙니다. 사회라는 감옥에서 표현되는 자신감에는 늘 나라는 의식이 뒤따릅니다.
교만한 이상주의자들이 뻐기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어떤 결과를 달성했다거나, 대단한
개혁에 성공한 정치 지도가들이, 세상에는 저희들만 있는 듯이 저희 이상과 업적에 대해 허풍
떠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나름의 평가에 따르면 그 사람들 아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연설문
몇 장만 읽어보면, 자칭 개혁가라는 자들을 몇 명만 관찰해보면 이들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들의 자아를 갈고 일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범위가 넓어도 그들의 개혁은 역시
감옥 안에서의 개혁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파괴적입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갈등하게 만들
뿐입니다.
자, 이 사회 구조 전반, 즉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집단 의지의 문화적 틀을 꿰뚫어 보아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뛰쳐나올 수 있다면, 힌두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든, 기독교
사회든, 여러분이 속한 특정 사회라는 감옥의 벽을 부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교만에 때묻지 않
은자신감이 생겨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자신감입니다. 새로운
문명을 지어내는 것은 순수한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회의 틀안에 안주하는 한 이
순수한 자신감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의깊게 들어주세요. 이 말을 하는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나의 진실을 이해시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육이라는 게 어차피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을 사회의 틀에다 맞추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당치도 않지요.
여러분이 사회의 틀을 완전히, 깊이, 폭넓게 이해하는 것을 돕고 이것을 깨뜨리고 나오게 하는 게교육의 참 기능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교만하지 않은 인간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순수하기 때문에 자신 만만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거의 전부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까,
이런 데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여러분이 던진 질문의 대다수가 여러분의
이러한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실제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부모님은 뭐라고 할까요,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여러분의 자신감과 주도성을 깡그리 때려
부수고 맙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이 없어도, 자동 인형처럼 고등 학교, 대학교를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유능한 사람이 되어 교문을 나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분에게 창조적 불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가 사는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이해의 과정을 통해 사회와 환경에서 뛰쳐나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건 전세계적인 문젭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대응책,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든 러시아에서든, 어디서든 낡은 방법은 썩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도전에 맞서는 일입니다. 보다 나은 경제 질서를 확립한다는 것은, 이런도전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못 됩니다. 도전이라는 것은 늘 새롭습니다. 문화, 국민, 문명이 이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면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 예사롭지 않은, 순수한 자신감을 획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집단에 흡수당하거나 범용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름 뒤로 몇 자의 직명을 거느릴 수는
있을 겁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입니다.
보세요, 우리들 대부분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까 봐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뿐만 아니라 정치와 종교까지 겁을 먹고 있습니다. 왜요? 이들은 모두여러분이 환경적, 문화적 영향력이 두루 미치는 감옥안에 안주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로 그 사회의 틀을 부수는 사람, 따라서 그 틀 안에
몰아넣을지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갇히지 않는 사람-이런 사람만이 새 문명을 지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의식 없이 순응하는 사람, 저 틀에 틀잡혔다고 해서 이 틀에 저항하는 사람-이런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신이나 진리에 대한 탐구는 감옥에 안주하는 대신 감옥을 이해하고그 벽을 부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자유를 향한 행동이 새 문화, 전혀 다른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이상주의자들, 그리고 구체적인 결과를 겨누고 부지런히 뛰는 다른 여러 사람들이 길들어 온 틀
안에서, 그들 자신의 사회 구조라는 벽안에서, 다수의 집단 의지가 표현된 문명의 문화적 틀
안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자신감이 무엇인지 자신감이라는 건
어떨 때 생기는 것인지 살펴볼 차례가 된 듯 합니다.
자신감은 주도적인 행위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나 어떤 틀 안에서의 주도적인 행위는 자기
과신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자기 과신은, 자기가 개재하지 않는 자신감과는 달라도 크게
다릅니다. 자신감을 갖는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손수 어떤 일을 한다면, 가령손수 나무를 심어서, 그 자라는 것을 보고,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혹은 나이가 들어 마
을에다리를 놓아준다거나 공직에서 행정적인 수완을 발휘했을 때 여러분은 그런 일이면 얼마든지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지금 우리가 아는 자신감은 모두,
감옥, 사회-공산주의 사회든, 힌두교, 혹은 기독교 사회든-가 우리 주위에다 친 울타리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의 주도권도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일을 잘 할 수 있게
하니까요. 여러분은 이 감옥 안에서의 자신감으로도 자동차를 설계할 수 있고 좋은 회사, 훌륭한과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 안에서 사회 구조를 계승하고, 개혁하고, 빛이
되고, 감옥의 내부 장식이나 하는 이런 종류의 자신감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기 과신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면,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느낍니다. 반면에 연구와 이해를 통해 여러분이 속한 사회 구조에서 이탈하려 할 때, 여기에서
는진짜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자기 과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양자의차이-자기 과신과, 자기가 빠진 자신감의 차이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삶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드민턴이나 크리켓이나 축구 같은 운동을 잘 할 수 있을 때, 여러분은 이런 운동에 자신감을
갖지요? 이때의 자신감은, 이런 운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둘 것임을 예감하게 됩니다. 수학
문제를 빨리 풀 수 있다면 이 능력 역시 여러분에게 자기 확신을 줍니다. 사회 구조 안에서의
행동에 자신을 느낄 때, 여기에는 늘 기묘한 교만 같은 게 끼어들지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멋진 결과를 달성해 낼 수 있는 사람의 자신감에는 늘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교만과,
하는 사람은 나라는 느낌이 묻어 다닙니다. 따라서 어떤 결과를 가능케 하는 그 행위자체, 감옥
안에서의 사회를 개혁하는 그 행위 자체에는 늘 행위자 자신의 교만, 즉 내가 그일을 해 내었고,
내 이상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며, 내가 속한 무리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느낌이
묻어 다닙니다. 사회라는 감옥에서 표현되는 자신감에는 늘 나라는 의식이 뒤따릅니다.
교만한 이상주의자들이 뻐기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어떤 결과를 달성했다거나, 대단한
개혁에 성공한 정치 지도가들이, 세상에는 저희들만 있는 듯이 저희 이상과 업적에 대해 허풍
떠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나름의 평가에 따르면 그 사람들 아주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연설문
몇 장만 읽어보면, 자칭 개혁가라는 자들을 몇 명만 관찰해보면 이들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저희들의 자아를 갈고 일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범위가 넓어도 그들의 개혁은 역시
감옥 안에서의 개혁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파괴적입니다. 사람들을 비참하게, 갈등하게 만들
뿐입니다.
자, 이 사회 구조 전반, 즉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집단 의지의 문화적 틀을 꿰뚫어 보아서,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여기에서 뛰쳐나올 수 있다면, 힌두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든, 기독교
사회든, 여러분이 속한 특정 사회라는 감옥의 벽을 부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교만에 때묻지 않
은자신감이 생겨난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자신감입니다. 새로운
문명을 지어내는 것은 순수한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회의 틀안에 안주하는 한 이
순수한 자신감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의깊게 들어주세요. 이 말을 하는 나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나의 진실을 이해시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교육이라는 게 어차피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을 사회의 틀에다 맞추게 하는 것은 교육의 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당치도 않지요.
여러분이 사회의 틀을 완전히, 깊이, 폭넓게 이해하는 것을 돕고 이것을 깨뜨리고 나오게 하는 게교육의 참 기능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교만하지 않은 인간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순수하기 때문에 자신 만만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들 거의 전부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까,
이런 데만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여러분이 던진 질문의 대다수가 여러분의
이러한 자세를 반영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실제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부모님은 뭐라고 할까요,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여러분의 자신감과 주도성을 깡그리 때려
부수고 맙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이 없어도, 자동 인형처럼 고등 학교, 대학교를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유능한 사람이 되어 교문을 나설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분에게 창조적 불꽃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가 사는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이해의 과정을 통해 사회와 환경에서 뛰쳐나와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건 전세계적인 문젭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대응책, 삶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든 러시아에서든, 어디서든 낡은 방법은 썩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도전에 맞서는 일입니다. 보다 나은 경제 질서를 확립한다는 것은, 이런도전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못 됩니다. 도전이라는 것은 늘 새롭습니다. 문화, 국민, 문명이 이늘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지 못하면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이 예사롭지 않은, 순수한 자신감을 획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집단에 흡수당하거나 범용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름 뒤로 몇 자의 직명을 거느릴 수는
있을 겁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입니다.
보세요, 우리들 대부분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까 봐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뿐만 아니라 정치와 종교까지 겁을 먹고 있습니다. 왜요? 이들은 모두여러분이 환경적, 문화적 영향력이 두루 미치는 감옥안에 안주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틀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바로 그 사회의 틀을 부수는 사람, 따라서 그 틀 안에
몰아넣을지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갇히지 않는 사람-이런 사람만이 새 문명을 지을 수 있습니다.
아무 의식 없이 순응하는 사람, 저 틀에 틀잡혔다고 해서 이 틀에 저항하는 사람-이런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신이나 진리에 대한 탐구는 감옥에 안주하는 대신 감옥을 이해하고그 벽을 부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자유를 향한 행동이 새 문화, 전혀 다른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크리슈나무르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연하는 게 선생님 취미인가요? 말씀하시는 게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왜 이런 일을 (0) | 2014.04.09 |
---|---|
선생님, 우리는 왜 친구를 사귀고 싶어하죠? (0) | 2014.04.09 |
인도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0) | 2014.04.08 |
인도 문화와 미국 문화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0) | 2014.04.07 |
느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서 느낍니까? (0) | 201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