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았다. 새색시 브린힐드는 시누이 구드룬과 함께 강가로 목욕하러
나갔다. 브린힐드로서는 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남자의 부인인 구드룬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구드룬으로서도 사흘 동안 밤마다 자기 남편을 빼앗아 간 브린힐드를 곱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두 여인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오갔다.
구드룬과 함께 옷을 벗은 브린힐드는 구드룬이 목욕하러 들어가는 강물 위쪽으로 올라가서 몸
을 담궜다. 브린힐드가 몸을 씻고 내려보내는 물에 목욕을 하게 된 구드룬은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봐요, 새언니! 여기서 같이 목을 하면 될 걸 가지고 왜 꼭 그 위에 가서 몸을 씻으려 하죠?
그러자 브린힐드는 눈매를 치뜨고 구드룬을 쏘아보았다.
아가씨, 그 이유를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아가씨와 내가 어떻게 한 곳에서 목욕을 할 수가 있
어요? 저는 출신도 아가씨보다 좋도 남편도 아가씨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잖아요? 제 남편은 아가씨 오빠, 이 나라의 왕세자예요. 아가씨 남편은 그런 제 남편의 시종에 불과하다구요.
이런 말에 발끈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진실을 알고 있는 구드룬임에랴.
이것 봐요, 뭘 좀 제대로 알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신 남편이 우리 오빠가 아니라 내 남편
시구르드란 말이에요. 우리 오빠가 당신을 차지할 능력이 모자라니까 내 남편이 오빠로 변장해서 당신을 그 남자와 함께 잠들었을지 모르지만 내 남편은 밤이 이슥해지면 당신 곁을 떠나 내
게로 와서 나와 즐거운 밤을 보냈어요.
브린힐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구드룬이 틀림없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구드룬이 손을 치켜들며 결정적인 증거를 내밀었다.
이 반지를 보세요. 이러고도 제 말이 틀렸다고는 못하겠죠. 내 남편이 당신 손가락에서 뺀 반
지를 제게 끼워주셨거든요.
브린힐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사태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자신은 완벽하게 농락
당했다. 더구나 자신을 농락한 그 남자가 실은 자신과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던 시구르드라니! 그녀는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침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소식
을 들은 군나르가 허겁지겁 침실로 달려왔다.
왜 이러시오, 부인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을 사랑하오. 제발 이러지 마시
오. 그러나 브린힐드는 차가운 눈길로 군나르를 보며 쏘아붙였다.
이 바보 같은 사람! 당신은 시구르드를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 치한은 당신을 속이고 나를 농락
했어요. 나는 매일 밤 그의 짐승 같은 야욕에 몸을 내맡겨야 했어요. 게다가 그 치사한 자식은 내 몸을 더럽히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아끼던 반지를 빼앗아 제 마누라에게 줬어요. 이
제 나는 떠나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서 죽은 듯이 지내겠어요.
군나르는 배신감과 질투가 뒤섞인 비참한 심정으로 브린힐드를 부둥켜 안고 애원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요, 뭐든지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소.
브린힐드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잠시 어리다가 사라졌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나를 속이고 욕보인 그 남자를 나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를
죽이세요. 그것말고는 그 무엇으로도 나를 달랠 수 없어요.
군나르는 벌벌 떨면서 그녀 앞을 물러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아우 회그니를 불렀
다. 회그니는 형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구르드를 해치웁시다.
군나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혀엦까지 맺은 사이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회그니는 완강했다.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시구르드는 엄청난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어요. 무력과 재력이 출중한
그가 언제 우리 왕국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를 제거하면 형은 복수를 하는 것이고 우리 형제는 큰 부자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누가 시구르드를 죽이지? 그와 의형제 밀약까지 한 우리가 직접 그를 죽이면 천벌을
면치 못할 거야. 게다가 놈은 천하장사라고.
회그니는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우리 동생 구트호름이 있잖아요그애는 밀약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시구르드의 피로 몸을 더럽
혀도 괜찮아요. 기회를 보아 기습을 하면 천하장사라도 당할 도리밖에요.
그리하여 음모는 완성되었다. 구트호름은 완강하게 악역을 거부했으나 보물을 미끼로 설득하는
회그니의 회유에 끝내 넘어가고 말았다.
달빛조차 희미한 한밤중에 일이 벌어졌다. 구트호름은 칼을 비껴들고 시구르드의 침실로 스며들었다. 시구르드와 구드룬은 간밤의 사랑이 지나쳤던 듯 알몸으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구트
호름이 치켜든 칼날이 어스름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순간, 살기를 느낀 시구르드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옆에 놓아둔 명검 그람을 구트호름에게 던졌다. 구트호름은 그 칼을 맞고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져 죽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구트호름의 손을 떠난 칼이 시구르드의 등을 꿰뚫은 뒤였다.
무언가 끈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잠이 깬 구드룬은 침대 주변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침대를 가득 덮고 있었다. 손을 좀더 뻗어 남편의 몸을 더듬는 순간 그녀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렀다. 안뜰에서 놀고 있던 집오리들까지 놀라 꽥꽥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닐 정도였다.
침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구드룬의 비명을 들은 브린힐드는 집안이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그녀의 배 안에서 울려나오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가 저 땅 끝 지옥에서 올라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브린힐드는 군나르와 회그니가 서 있는 궁정으로 나왔다. 군나르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
다. 보시오, 시구르드는 죽었소. 우리는 원수를 갚았소.
그러나 브린힐드는 다시 한번 몸서리쳐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군나르의 손을 뿌리쳤다.
바보 같은 자식! 시구르드는 나를 범한 적이 없어. 그는 내 옆에 누워 자면서도 둘 사이에 칼
을 올려놓은 끝까지 너와의 의리를 지켰어. 속임수를 써서 나를 아내로 맞은 것은 바로 너야. 나
는 악을 악으로 갚은 것뿐이라고. 자,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어.
브린힐드는 들고 있던 칼로 자기 가슴을 푹 찔렀다. 군나르가 말릴 틈도 없었다. 이로써 지상에
서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비련의 남녀는 함께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것은 또한 저주받은 안드바리의 반지를 손에 지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규키가의 사람들은 이 무서운 저주 앞에서 모두 부르르 떨었다. 이제 시구르드가 차지했던 안드
바리의 보물은 그들 손에 들어왔다. 앞으로 그들 앞에는 또 얼마나 무서운 저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규키 일가는 훗날 훈족의 아틀리 왕에게 몰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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