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話 이야기.

영원하자던 사랑의 맹세는 깨지고

별관신사 2015. 11. 9. 05:35

시구르드는 브린힐드에게 반드시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불 속의 집을 떠났다. 그가
명검 그람을 차고 명마 그라니에 올라 세상을 주유하다가 이른 곳은 규키족의 나라였다.
규키족 왕에게는 혼기가 꽉 찬 구드룬이란 딸이 있었다. 규키왕은 마침 자기 나라에 들른 천하

제일의 영웅 시구르드를 사위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시구르드는 브린힐드를 생각하며 점잖게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규키 왕의 아내 그림힐드는 신통한 요술의 소유자였다. 시구르드를 꼭 딸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어느날, 그녀는 마법의 술잔을 시구르드에게 건넸다. 영웅은 그 술을 받아먹자마자 브린힐드에 관한 기억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별다른 거부감없이 명문가인 규키 가문의 규수를 신부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시구르드는 일찍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부터 아내의 오빠, 그러니까 처남인 군나르, 회그니 형제
와 의형제 맹약을 해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술도 마시고 사냥도 다녔다. 시구르드는 모든 면에서 처남들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런 매제를 눈여겨 보던 군나르는 어느날

시구르드와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중요한 부탁을 하고 나섰다.
이보게, 매제! 내부탁 좀 들어주겠나?
거나하게 취한 군나르는 비틀거리면서 시구르드에게 다가와 꼬부라진 혀로 이렇게 말을 걸었

다.말해 보게, 처남. 우리는 피를 나눠 마시며 의형제를 맺은 사인데 무슨 일인들 돕지 못하겠
나? 그의 아내 구드룬은 호기롭게 대답하는 시구르드를 흐룻하고 애정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산꼭대기에 천하절색의 미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가?

시구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브린힐드와 사랑을 나누던 기억은 그의 머리를 떠나고 없었
지만, 천하를 주유하던 그였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남아 있었고, 그 산이 어디쯤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미녀의 이름은 브린힐드라고 한다네. 오딘의 명령을 수행하던 발키레였다더군. 내가 그 여
자와 결혼을 하고 싶은데 좀 도와 주지 않겠나?
시구르드는 브린힐드 란 이름을 듣자 잠시 멈칫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머릿속을 어

른거리는 상념을 붙잡으려고 애를 써봤으나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처남을 바라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산이 어디쯤 있는지는 내가 잘 아니까 안내를 함세. 나를 따라오게.

그들은 다음날 아침 함께 암사슴 산으로 원정길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다다라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시구르드는 다시 한번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역시 아무 생각도 해내지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군나르는 창을 꼬나쥐고 무서운 기세로 불길을 향해 돌진했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발길을 돌렸
다. 아니, 발길을 돌린 것은 그가 아니었다.
왜 돌아오나?

시구르드가 물었다.
글쎄, 이놈의 말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질 않네그려.
시구르드는 자신의 말 그라니를 군나르에게 빌려주었다. 그러나 천하의 명마 그라니조차 군나

르를 태우고 불 근처에서 한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 그래. 내가 직접 하겠네.
시구르드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서 그녀를 구해내면, 정해진 운명에 따라서 내가 브린힐드의 남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의 갑옷을 내게 주게. 내가 자네로 변장해서 들어가도록 하겠네.
시구르드는 처남의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그라니 위에 올라 탔다. 그러자 군나르는 기다렸다

는 듯이 어머니 그림힐드가 준비해준 물약을 시구르드에게 건넸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림힐드는 시구르드에게서 열렬한 사랑의 기억을 지워버렸을 정도로 뛰어난 마술사였다. 그녀가 특별히 조제해 준 그 약을 먹은 시구르드는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 주인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즉
군나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영락없이 군나르가 되어 버린 시구르드는 힘차게 고삐를 잡았고 그라니는 앞발을 들고 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온세상을 향해 포효한 뒤 맹렬한 기세로 불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는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이 불벽을 뚫고 미녀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짖쳐 들어갔다. 마법의 약이 시구르드의 체력과 말 다루는 솜씨마저 군나르의 것으로 바꿔놓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 당신은 누군신가요?
흠칫 놀라 잠에서 깬 브린힐드가 군나르의 모습으 한 시구르드에게 물었다.
나는 규키가의 왕자 군나르라고 하오. 내가 그대를 구하려고 저 불벽을 뚫고 이렇게 들어왔소.

이제 그대는 내 아내가 되었소이다.
그러나 브린힐드는 옷깃을 여미며 경계 자세를 풀지 않았다. 오매불망 시구르드를 기다려 왔건
만 눈앞에 나타난 사나이는 전혀 예상 밖의 인물.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내게 가까이 오지 마시오. 나는 피로 물든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사내들을 때려줍히던 죽음의
전령이오. 내게 함부로 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오.

브린힐드는 매몰차게 경고한 뒤 칼을 빼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대는 비록 삼류 한량의 얼
굴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다. 시구르드는 좀더 브린힐드를 설득하다가 더 이상 시간을 끌기가 싫어 힘으로 그녀를 제압했다.

당신이 뭘 믿고 지금 이렇게 저항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오딘이 저안 운명에 따르면 당신은 내
여자가 될 수 밖에 없소. 이 불의 담장을 뚫고 들어올 사내는 단 한 명뿐이란 걸 나도 익히 듣고
있었거늘.
심한 혼란에 빠진 브린힐드는 칼을 빼앗기고 시구르드의 완력에 굴복당해 그의 말에 실리는 꼴

이 되고 말았다. 꼼짝못하고 시구르드의 등에 몸을 맡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내가 꿈이라도 꾸었다는 건가? 분명히 이 남자는 불을 뚫고 들어

왔어. 그리고 힘도 보통이 아냐.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시구르드와 맞먹거나 그 이상이야. 하지만 이건 아냐. 이 남자한테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야. 아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브린힐드를 태우고 쏜살같이 규키의 궁정으로 내달리는 시구르드로부터 한참 뒤처진 곳에서 군
나르와 회그니가 달리고 있었다. 규키의 궁전으로 돌아온 시구르드와 군나르는 서로 바꿔 입었던 갑옷을 다시 교환했다. 시구르드는 자기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리 연락을 받은 궁전에서는

벌써 결혼식 준비를 다 마쳐놓고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군나르 모습의 시구르드에게 이미 기가 꺾여 있던 브린힐드는 참담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결혼식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명문가답게 결혼식은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어찌 되었든 브린힐드로서는 오랜 유폐 생활을 벗

어나 인간 세상에서 새출발하는 의식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아름다운 신부 화장을 하고 예식에 참여했다. 왕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딘이 이제는 그녀를 용서하고 새출발을 축하하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식을 마치고 결혼 피로연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허물어져갔다. 이제는 꿈속에서 봤겠거니 하면서 포기하고 있던 그 남자, 강렬한 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남자 시구르드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러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

다. 더군다나 시구르드는 다른 여자의 남편, 그것도 자기 시누이의 남편으로 피로연장을 부산히 돌아다니며 하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등 진행을 맡고 있는 게 아닌가?
브린힐드는 애원을 담은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당신이 여기 있었군요. 우리 사랑의 맹세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요? 하지만 맹세를
먼저 깬 것은 당신이었지요. 제발 저를 보세요. 저를 지옥보다 더 괴로운 신방으로 보내지 마세요. 저를 여기서 빼내 도망쳐 주세요. 어디든지 따라 갈게요.

마침내 시구르드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번 경악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시구르드는 전혀 브린힐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환하게 웃으며 남에게 하듯 인사를 건네 시구르드의 태도는 연기라기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날 밤 브린힐드는 혼돈과 모멸감과 좌절감 속에서 군나르의 접근을 철저히 뿌리쳤다. 그녀의
저항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군나르는 홀로 자는 것보다 외롭고 힘든 밤을 보내야 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몰래 신방을 빠져나와 자존심을 억누르고 매제인 시구르드를 불러냈다.

우리 누이와 꿀 같은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었을 텐데 이렇게 불러내 정말 미안하이. 하지만
저 여자가 끝내 나를 거부하니 어떡하나? 제발 이번 부탁만 한번 더 들어주게.
군나르의 부탁은 다시 한번 시구르드가 자신으로 변장해 브린힐드와 동침하면서 그녀를 길들여

달라는 것이었다. 사람 좋은 시구르드는 다시 한번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다시 군나르로 모습을 바꾼 시구르드는 신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저항하는 브린힐드를 번쩍 침대
에 뉘었다. 한번 나갔다 오더니 불을 뚫고 들어왔을 때의 기력을 회복한 남편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완력에 밀린 브린힐드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시구르드는 갑옷을 벗었다. 브린힐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옷을 다 벗은 시구르드가 브린힐드에게 다가오더니 허리춤에서 명검

그람을 빼드는 것 아닌가? 눈을 감았던 브린힐드도 칼에서 비치는 섬광에서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시구르드는 말없이 칼을 그녀 옆에 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불을 끄고 자신도 그 옆
에 누웠다. 시구르드와 브린힐드 사이에 시퍼런 칼날이 놓인 것이다. 두 남녀는 아무리 한 지붕
밑한 침대에서 잠을 자더라도 서로의 살을 맞댈 수가 없었다.

이튿날 밤에도 군나르 모습의 시구르드는 똑같이 했다. 밖에서 보면 완전한 부부였지만 실제로
는 완전한 남이었던 것이다. 브린힐드는 밀려오는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당신은 나를 원해서 결혼했으면서도 나를 범하지 않으시나요?

시구르드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니 나라의 결혼 풍습에 따르는 것이오. 첫 사흘 간은 이렇게 순결을 지키며 지내야 하오.
사흘째 밤, 침대에 누운 시구르드는 말없이 브린힐드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반지를 끼워주었다. 용 파프니르가 지키고 있던 보물 속에서 나온 그 저주받은 반지였다. 옛날 난쟁이 안드바리가 로키에게 이 반지를 빼앗길 때 퍼부었던 저주, 반지의 주인에게 재앙이 내릴 거라는 그 저주를 알지 못한 채.

브린힐드는 이것이 처녀로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딘의 전령으로서 전선을 누비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암사슴 산에서 시구르드와 나우었던 짧은 사랑의 기억도, 원치 않던 결혼식 날 그녀를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던 시구르드의 야속한 눈길도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녀의 눈에서는 한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