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話 이야기.

시구르드, 잠자는 미녀와 사랑을 나누다

별관신사 2015. 11. 8. 16:45

브린힐드는 오딘의 총애를 받던 시녀 발키레 중의 하나였다. 발키레는 오딘의 명령을 받아 전사
의 영혼을 천상의 발할라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상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오딘은 발키레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사들을 죽여 발할라로 데려오도록 한다. 독자 여러분은 제1장

신들의 왕, 오딘 편에서 오딘의 지시로 전사를 죽이는 브린힐드의 활약상을 본 기억이 있얼 것이다.
어느날, 그토록 오딘에게 충성스럽던 브린힐드가 갑자기 오딘의 명령을 어기는 사태가 일어났

다. 오딘이 죽이라는 남자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남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닌 브린힐드는 그 남자의 상대방을 꺼꾸러뜨려 발할라로 데려왔다.

크게 분노한 오딘은 나뭇가지로 브린힐드를 찔렀고, 브린힐드는 저주가 걸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들게 되었다. 오딘은 그녀를 지상의 어느 산꼭대기 집에 가두어 두고 집 주위를 영원히 타오르는 불로 둘러 쌌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불의 담장을 뚫고 들어갈 용사가 아니면 그녀를 깨울 수 없으리라!
바야흐로 그 용사가 지금 산을 오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시구르드, 오딘의 피를 이어받은 볼숭
가의 젊은 영웅이다.

명마 그라니에서 내린 시구르드는 불타오르는 담장을 자세히 살폈다. 방패들로 이루어진 담장은 시뻘건 불길로 뒤덮여 있어서 보통사람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시구르드는 이미 새들의 말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알고 이었으므로 과감히 칼을 빼들고 화염 앞으로 나아갔

다. 뼛속까지 파고들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그는 담장 밑을 파헤쳐 그 아래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불 담장 안에는 완전무장한 사내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아름다운 처녀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 친구는 경비원인가? 그런데 이렇게 태연히
자고 있으면 어떡해?
시구르드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사내의 투구를 벗겼다. 그 순간 시구르드는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막상 투구를 벗기니 건장한 사내인 줄 알았던 투구의 주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시구르드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녀가 입고 있는 무거운 갑옷을 벗기려 했다. 그러나 갑옷은 마치 그녀 몸의 일부이라도 되는

듯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시구르드는 실오라기도 반으로 가를 수 있는 명검 그람으로 갑옷을 잘라내기 시
작했다 타오르는 불꽃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갑옷의 비늘들이 하늘씩 둘씩 떨어져 나가다.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가 오롯이 드러나자 여인은 마침내 눈을 떴다.
여인이 물었다.
아아, 용사여! 그대는 누구시온지요?
제 이름은 시구르드. 볼숭가의 위대한 왕이신 시그문드의 아들입니다. 그대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눈부시게 웃으며 일어나 해를 오려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오오, 태양이여! 그리고 태양의 모든 아들들이여! 바라옵나니 우리 두 사람을 굽어 살피소서.
우리 두 사람에게 승리를 내려주소서!

시구르드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제 이름은 브린힐드랍니다. 오딘의 명령을 받들어 전사들의 영혼을 무지개 다리 건너 인도하던
발키레였죠.

브린힐드는 여기 누워 있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시구르드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브린힐드는 밝게 웃으며 뿔잔에 영롱한 빛을 뿜는 액체를 따라 시구르드에게 건넸다.
이 술을 드세요. 용기와 영예를 주는 마법의 술이랍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술이지요.

시구르드가 뿔잔을 죽 들이켜자 브린힐드는 그에게 룬 문자를 가르쳐 주었다. 시구르드는 브린
힐드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내 아내입니다.

브린힐드도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수많은 남성 가운데서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두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말자는 굳은 사랑의 맹세를 했다. 타오르는 불 속에서 두
남녀는 일찍이 어느 누구도 나누지 못했던 열렬하고 진실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딘의 얼굴엔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신이

점지해 준 두 남녀의 미래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