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

[앎]

별관신사 2013. 7. 10. 04:39

[앎]

이 앎은 존재 아니면 무(無)라는 식의
8가지 극단적인 견해에 속박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중심이라고 부른다.
이 앎은 티 한 점 없이
맑게 깨어 있는 지성이다.
이 앎은 비어-있음 과 깨어-있음 의 본질이기 때문에
희열로 충만한 주님들의 본질 이라고 부른다.
이를 알면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초월적인 지혜라고 부른다.
마음을 능가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에
마하무드라(大印)라고 부른다.
이 앎을 깨달으면 자유와 행복이고
깨닫지 못하면 삶의 속박과 고통이기 때문에
자유와 속박의 기초라고 부른다.
이 앎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내면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밝고 분명한 의식 자체가 곧 이 앎이다.
그래서 평상심(平常心)이라고 한다.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지,
이 앎은 현재-의식 의 각성일 뿐이다.
이 앎 밖에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대의 마음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이잡듯 뒤져도 찾지 못한다.
코끼리를 잡으려면 그 발자국을 따라가야 하듯이,
마음을 찾으려면 마음의 흔적만을 좇아가야 한다.
마음 밖에서는 붓다를 찾지 못한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무엇을 찾고자 한다면,
붓다는 영원히 찾지 못한다.
이는 마치 군중 속에 섞여서 자신을 망각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얼간이와 같다.
우주의 궁극적인 실체인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대의 혼미한 마음으로 인해
윤회의 수레 바퀴에 휘말려 들어간다.
그대의 마음이 붓다인 줄을 깨닫지 못하는 그 마음이
니르바나(涅槃)를 흐리게 하는 장애물이다.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해탈과 윤회가 갈린다.
해탈과 윤회는 한 찰나에 갈린다.

마음이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올바른 생각이나 그렇지 못한 생각이나,
모두 같은 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간섭이나 판단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무는 마음 그 자체는 자유다.
잘못된 생각 조차도 그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주의 실상(實相)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이 머무는 곳은 어디이며,
최후에는 어디로 사라져 가는가?
모든 생각은 물에 비친 까마귀 그림자와 같다.
까마귀가 연못 위로 날아가 버리면
물에 비친 그림자도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나와도
마음은 연못처럼 늘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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