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대는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눈앞을 떠 다니는
사념들 없이 볼 수 있다.
결론내림 없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결론내림 없이 볼 때 그대의
시야는 넓어지고 한정됨이 없다.
힌두교도는 성경을 읽을 수는 있지만 이해
하지는 못한다. 사실 그는 성경을 전혀 읽지
않으며 또 들을 수도 없다.
기독교인이 바가바드기타를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낯선 국외자일 뿐이다.
그는 결코 깊은 존재를 통찰하지 못한다.
그는 결코 내면의 영역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그것의 주위를 맴돌 뿐이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진실하다고
믿고 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이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신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크리슈나를
들을수 있을까? 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만이
진실하다.
크리슈나는 하나의 허위 기껏해야 하나의
아름다운 허위로 여겨질 뿐이다.
결코 진실하지 않다. 아니면 백보 양보해서
진실에 가깝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진실에 가깝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즉 그것은 허위이다. 진실은 거기에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없다. 이런 의미인 것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은 있을 수 없다.
진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전체이다. 그것을 나눌 수는
없다. 그대는 그것은 어느정도는 진실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럴수 없다.
진실이거나 아니면 진실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유일한 진리라는
결론을 마음에 품고 있을때는 크리슈나를
듣는것이 불가능하다.그대가 길을 건너
그에게로 다가온다 해도 그대는 그를
들울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붓다를 만난다
해도 그대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오쇼의 장자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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