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삶을 논하고 있는 세 벗이 있었다.

별관신사 2020. 9. 24. 03:11

먼저 이해해야 할것은 오로지 친구들만이

삶을 토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이 적대적이 될 때 하나의 논쟁이 될

 

때 그때 대화는 깨어진다.

삶은 그러한 방법으로는 토론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친구들만이 토롤할 수 있다.

 

그때 토론은 논쟁이 아니며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논쟁과 토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논쟁할 때 그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비록 그대가 듣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들음이다.

그대는 진정으로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단지 그대의 논쟁을 준비히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동안 그대는

반박할 준비를 하고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동안 그대는 단지

그대가 되받아 논쟁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그대 속에

 

편견을 지니고 있다.

그대에게는 이론이 있다. 그대는 탐구하고

있지 않으며 그대는 무지하지 않으며 그대는

 

순수하지 않고 그대는 이미 가득차 있다.

그대의 배는 비어있지 않다. 그대는 그대의

이론을 갖고 다니며 그것들이 진실이라고

 

증명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탐구자는 어떤 이론도 갖고 다니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열려 있고 매혹되기

 

쉽다. 그는 들을 수가있다.

힌두교도는 들을수가 없다. 마호멧교도는

들을수가 없다. 힌두교도가 어떻게 들을수가

 

있을까? 그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으며

거기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로 하여금  듣게 만들려

 

하지만 그는 들을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이미 꽉 차 있어 어무것도

뜷고 들어갈 수가 없다.

 

기독교인은 들을 수 없다. 그는 이미 진리를

알고 있다. 그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닫아 버렸다.

 

그는 도달했다. 그는 이미 이르러 있는

것이다. 어딘가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만 충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갈등이 생겨나고 그들은

서로 반대한다.이런 토론 속에서 그대는

 

무엇인가 증명할른지 모르지만 실재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는다. 그대는 상재방을

침묵 시킬지는 모르지만 그가 변화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전쟁 문명화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기를 갖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갖고 싸우는 것이다. 장자는 말한다.

세 친구가 삶을 논하고 있었다. 그것이 곧

그들이 웃음에 도달한 이유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기에는 결론이 있었을

것이다. 한 이론이 다른 이론들을 피배

시키고 한 철학이 다른 철학을 누른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하나의 결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결론이 없다.

삶은 그것에 대해 어리석은 생각을 갖지

 

않는다. 삶은 끝없이 진행된다. 삶은 언제나

영원토록 앞으로 가는 일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가 삶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대가 결론짓는 순간 그대는

그것에서 벗어난 걸음을 걷고 있다.

삶은 계속되고 그대는 그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결론에 집착

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삶은 그대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오쇼의 장자강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