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생애에 대하여

별관신사 2014. 3. 30. 06:02

1847년 1월 그는 병으로 카쟌 병원에 입원하였었다. 그때의 일기를
보면 학생답고 참다우며 무엇인가를 무한히 탐구한 사실이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회는 세계의 일부인 것이다. 사람이 본래 타고난 지능은 세계, 즉
전체이며 그의 원인과 결과의 규정을 판단하는 작용으로서 그것과
일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일부분인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글 속에 암시되어 있는 사회 이상의 뜻은 끊임없이 탐구하는
가운데서 보통 수준을 훨씬 초월하여 사회를 인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다음과 같은 글은 그의 생활 태도를 확실히 알게 한다.
「나는 여러 가지 잘못 되었던 점을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학교의 과목에 대하여 충실히 공부해 본적이 없다. 설령
실행했다하더래도 졸렬하게 실행했다. 또한 나는 기억을 연마하지

않았다. 이제 공부하는데 필요한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적어
실천하여야겠다.

첫째, 반드시 실행하겠다고 정해둔 것은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실행에
옮길 것.
둘째, 실행하겠다는 일에 대해선 성심성의로 단단히 실행할 것.
셋째, 잊어버린 것은 절대로 다시 책을 보지 말고 반드시 자신의 머리
속에서 밝혀내도록 노력할 것.
넷째, 내가 지니고 있는 지혜는 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기울여 활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
다섯째, 언제든지 소리를 내어 읽고 소리를 내면서 생각한다.
여섯째, 방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방해가 된다는 것을 주저하지 말고
타이를 것. 처음엔 느끼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들이 깨닫지 못할 경우엔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정중한 태도로서
그들에게 상세한 이유를 말해 주는 것이 좋다.」

1847년 4월 17일의 일기는 그의 가장 깊은 정신적 요구에 부딪힌 것처럼
다음과 같이 서술하기도 했다.
「생활 양식의 변화는 당연히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외면적인 사정의 산물이 아니고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의 산물이 필요하다.
....인생의 목적은 존재하는 것이고 전체의 전면적 발달에의 의식적인
전진인 것이다. 여자와의 교제는 사회 생활상 어찌할 수 없는 불쾌한

것으로 보아 될 수 있는 대로 그들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실제 우리들은
여자로부터가 아니고 어느 누구로부터 호색, 유약, 만사에 있어서의
경솔한 것 및 기타, 이모저모의 여러 가지 악덕을 받게 된다. 우리들로

하여금 과단, 굳센 기상, 분별력, 공평함 기타 여러 가지의 순수한 감정을
잃게 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여자는 남자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여자는 미덕이 숭상되는 시대에 있어서 우리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방탕과 악덕만이 존재하는 현대에 있어서
여자는 우리들보다 더 가치 없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이와 같은 노력은 자기 인격을 높이는데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여 있으면서 카쟌 대학을 중퇴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그해 전반기의 학기 시험에 출석하였으나 전 과목에 대한 학점을

완전히 따지 못하였다. 그는 사실 이때부터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는 어느 물음에서 「그랬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내가 남보다 몇
갑절이나 지식욕이 유달리 많았던 것이 대학을 그만 두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입니다. 캬잔 대학의 교수들이 베풀어주는 여러 가지 강의가
그다지 나의 흥미를 끌어올리지 못했습니다. 처음 반년 동안 나는
동양어과에 다녔으나 매우 좋지 못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에 열중하여 독서를 골고루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책을 읽어 봐도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경향의 것이었습니다. 어떤 한가지의 제목이 나의
흥미를 복돋아주는 경우엔 나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그 문제에만 장신을

집중하여 꼼짝하지 않고 그 한가지의 문제에 광명을 던져줄 만한 모든
요소를 밝히려고 무척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카쟌에서도 역시 그렇게
지냈습니다.」

또 다른 물음에서 역시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내가 대학을 중퇴하게 된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형이 대학을
졸업하여 카쟌을 떠나게 된 것이고, 둘째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형법과 법의 정신을 공부하고 있을 때, 그 책들은
나에게 독립 심적 발전에 새로운 분야를 계시(啓示)해 주었는데 대학에선
여러가지의 일을 요구하면서도 그 심적 발전에 힘을 빌려주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방해를 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4월 12일에 퇴학원을 카쟌 대학의 교무처를 거쳐 교수회에
제출하였다. 그것이 허가되자 갑자기 카쟌에 대한 모든 애착심을 모조리

버리고 형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가버렸다. 그
후 톨스토이가 그만둔 카쟌 대학의 강의실 의자에서 레오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이라고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그는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가 대학에서 배울 수 없었던 공부를
철저히 연구해 보겠다는 신념으로 확고한 태도를 취하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생활의 목표를 세웠다.

1. 대학의 졸업 시험에 필요한 법과의 전과목을 습득할 것.
2. 임상의학과 의학원론의 일부분을 습득할 것.
3. 프랑스, 러시아, 독일, 잉글랜드, 이탈리아, 라틴의 말을 습득할것.
4. 역사, 지리 및 통계학을 습득할 것.
5. 중등과의 수학을 습득할 것.
6. 학위 논문을 기초할 것.
7. 음악과 회화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할 것.
8. 언행록(言行錄)을 작성할 것.
9. 자연과학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을 얻도록 할 것.
10. 앞으로 습득한 모든 학과를 저술할 것.

그는 이와 같은 새로운 생활의 목표를 세워 문자 그대로 실천에 옮겨
대학 교수가 강의하는 것을 듣는 것의 몇 갑절되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는 3천여 권의 학술 전문 서적과 5천여 권에 달하는 문학 종교
음악 회화 등에 관한 서적들을 연구하여 그것을 낱낱이 소화해 냈다.
범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큰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중

철학에 관한 논문 가운데서 [철학의 목적에 대하여]라는 논문은
지금까지도 철학자들의 찬양을 받고 있다. 그는 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를 전후하여 철학에 관한 학술서적을 많이 읽어 논문까지

쓰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철학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전진한다. 즉 사람은 활동적인 것이다. 그
활동력을 어디에로 돌리면 좋을 것인가. 어떻게 하여 그 활동력을

자유로운 것으로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참다운 철학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은 실생활의 학문이다.」
그는 이 밖에 [미래의 생활에 관한 비판에 대하여], [시간, 공간 및

수의 판정], [방편론], [철학의 정의] 등을 써보려고도 무한히
노력하였다.
톨스토이는 그 당시 자기의 사상에 대하여 [나의 참의]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유년시대부터 배운 종교의 교의가 나의 가슴에서 사라진 것도 열 다섯
살 때부터 철학에 관한 서적을 읽었기 때문이다. 종교의 교의에 대한

불신이 매우 일찍 의식적으로 되어졌다는 데서 싹이 튼 것이라고 믿는다.
열 여섯 살 때부터 기도에 참가하는 것을 중지하고 나의 각성에 따라서
교회에 다니거나 회개하는 것도 중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믿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 시대를 회상하니 나의 신앙이 동물적인
본능 이외에 나의 생활을 좌우하고 있는 것, 즉 그 시대의 내가 지녔던
유일한 신앙이 완전무결을 믿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나는 일상생활에 있어 반드시 명심해야 할점에 대한 비망록을 마련해 두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것들이 자기
완성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완성의 근본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내적 완성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생각하니
일반적인 완성이 요긴한 것이었다. 즉 자기 자신을 목표로 삼지 않고
타인을 목표에 두고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것은, 타인보다

힘있는 것으로 그리고 타인보다 명망이 있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새로운
욕망이 필요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철학 공부를 하게 된 후부터는 신을 목표로 한 자기 완성의

방법론에 있어 약간의 변동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신앙의 마음을
송두리째 변모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아심이 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도 있다.

「내가 걸어온 청춘기의 10년간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교훈에
가득찬 경력을 갖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와 같은 경력의
주인공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심으로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했었다. 신기한 것을 탐구하고 있을 때엔 나는 고독했다. 지극히
참다운 희망은 내가 두드러지게 유명한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공개하려고 할 적마다 나는 번번이 멸시와 비웃음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야비한 정욕에 사로잡혔을 때에만 그들은 나를
칭찬하고 나를 격려하는 것이었다.」
이 짧은 글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진리탐구에 힘을 기울였던

톨스토이의 심중에도 커다란 고민의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의 러시아 귀족 사회에 있어서도 전 유럽 황혼기의 특색인
중상, 모략, 시기, 질투 등의 좋지 못한 풍조가 침투되어 있었다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톨스토이는 [지주의 아침]에서 대학을 중도에서 그만두게 된 원인의
하나는 농촌 생활에 몸을 바치고자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는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새로운 조직으로 농사 관리를 하기 위하여
소작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다.
다음 편지는 그러한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우리들의 농사 형편이 글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곤란한 현재의 농사 형편을 질서정연하게 해보려고 자세히 그것을 살펴본

결과 나는 가장 중대한 화근(禍根)이 극빈한 농민들에게 있다는 사실과 그
화근은 근로와 인내로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7백 명의 소작인들에 대해서 나는 신에게 답변해야 할 의무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7백 명이나 되는 소작인의 행복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은 나의 신성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스스로의 쾌락과
명예만의 욕심을 채우려고 그네들을 흉악한 소작인의 감시원이나

관리자들의 횡포에 맡기고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자기를 훌륭한 지주가 될 수 있는 인간 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하여 무척 애썼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현실 앞에선 허무한

것이었다. 소작인들이 그의 진정을 알아줄 리 없었다.
「도대체 내가 가지고 있는 소작인들은 얼마나 유족 하게 되었는가?
교육을 받게 되었는가? 도덕적으로 향상이 되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를 못하였다. 그들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만일 내가 스스로
설계한 일에 성공을 하였더라면 그리고 백성들의 감사를 받게 되었더라면,
그러나 허사다. 나의 눈에 띄이는 것은 다만 성의가 없는 대수롭지 않은

인사와 좋지 못한 버릇과 불신과 무력한 것뿐이다. 나는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젊은 청춘을 낭비하였다.」
톨스토이는 꿈이 많고 공상이 많았다. 젊은 그는 진심으로 농민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반면 자기가 지니고 있던 꿈만은 무엇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소설 창작면에 있어서는 놀랄만한 연구를 하였으나 농촌의 제반
문제를 이상적으로 해결해 보고자 한 노력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가을이 되자 야스나야 폴리야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하고
페테르스부르크로 떠났다.
페테르스부르크로 옮겨간 그는 헝가리 원정에 참가할 군대에 들어가는

것과 후에 관리의 지위를 갖기 위한 대학 검정 시험을 치루는 일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그는 지식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하여 페테르스부르크의 대학에서 학사 검정 시험을 치렀으나 문자

그대로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도 그는 시험 날짜를 일 주일 앞두고
밤새움하여 지정된 민법의 두 과목만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과거에 겪어온 생활이 낡은 관념들을 모조리 청산하고

실속 있는 생활 형태로 전환시키려고 결심했으며 새로운 희망에 넘쳐
있었다.
1847년 2월 13일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앞으로의 저의 태도를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한번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과거에 취해온 태도와는 전연 다른 각도에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번번이 경솔한 짓을 해왔습니다마는 이번만큼은 내 자신이
확실히 변화된 것을 신중히 생각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크게 깨달은 것은 철학 이론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며 결국 실제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발전인 동시에 큰 변화입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사실을
전 절실히 느꼈습니다. 어떤 젊은이든지 참다운 생활을 하려고 할 때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지내는 것이 가장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편지로 그가 공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날려고 무한히 고민했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실질적인 생활의 발전을 탐구했던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 현실과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지낸 얼마 후 많은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 공연히
많은 금전을 낭비하였다고 생각한 그는 잘못을 크게 반성하고 이번엔

군인이 되어 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이 결심을 그는 형에게 알렸다.
「....그러나 이제는 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간부
후보생으로서 근위 기병 연대에 입대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형님께 말씀드리게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형님께서는 저를 지극히 사랑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리석어 중심을
잃었다는 것을 슬퍼하시리라고 믿는 까닭입니다. 저는 편지를 쓰면서도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수치감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형님께서도 역시
이 편지를 보시면서 같은 생각을 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미 지난 일은 아무리 뉘우쳐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현재 저의 심정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만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최선의 방법에 따라 진실한 인간이 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저는 근위병의 복무에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장교로

승진될 때까지 복무를 할 생각입니다. 운이 좋으면, 즉 만일 근위병
연대가 실전에 참가하는 경우가 있다면 저는 2년이 되기 전에 진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톨스토이는 근위병으로서 새로운 길을 찾고자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생활 환경과 안정되지 못한 심리상태는 앞에서 소개된 몇 개의 편지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는 불안과 초조에서 안정을 찾지 못했으며

참다운 반성과 자각을 갖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1849년 그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독일 출신의 천재 음악가 루돌프를
야스나야로 데리고 가서 매일같이 음악희를 열었다. 한편 자기 자신도

음악 공부에 반 미치광이가 되어 루돌프를 소설 [알밸트]의 모델로 썼다.
그는 1849년의 일 년간은 편지를 가금 썼지만 일기는 전연 쓴 일이
없었다. 이때 그는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혼란을 일으켰다. 일기 쓰는

데엔 관심이 없었고, 고통, 울분, 계획의 실패 등을 편지로 적어
의논하거나 하소연하는 정도였다.
다음의 문장들은 1850년의 일기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나보다 못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은 나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돈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과 놀음을 할 것. 그 이유는 내가 설령

이긴다하더라도 상대방에 대하여 그다지 물질적 손실을 주지 않으며 그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또한 파산시킬 수 없는 까닭이다.」
「꼭 짐승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연 도덕적 관념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처리해야만 할 일을 거의 돌보지 않고 나의
의지가 대단히 약해졌다.」
그는 23세까지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술과 노름으로 그가 이루지

못한, 그리고 해내지 못한 것들과의 갈등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는
자기의 그릇된 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적어 그것을 규명하려 했다.

첫째, 결단성이 없는 것, 즉 에너지의 부족.
둘째,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
셋째,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
넷째, 허위의 수치.
다섯째, 기분이 좋지 못한 것.
여섯째, 이치에 어두운 것.
아홉째, 모방
여덟째, 마음이 변하기 쉬운 것.
아홉째,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그는 이때부터 질서를 찾기 시작했다. 노름이 끼치는 영향을 깊이
깨닫고 방탕한 생활과 대립되던 자기 의지의 일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해 그의 아주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러한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당신은 제게 대하여 좋은 교훈을 골고루 말씀해 주셨습니다. 칭찬은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같은 비율로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호기심을 또는 명예욕을 이용하여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해로운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의가 없는 칭찬은 사람에게
교만한 마음을 늘게 하는 원인이 되니까요. 그러나 당신의 칭찬은 제게
이익만을 줍니다. 그 까닭은 진실하고도 순결한 기분에서 말씀하시고

제가 칭찬을 받을만한 경우에 한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그후 다시 야스나야 폴리야나로
돌아가 그곳에서 머물다가 3월 다시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또 다시

노름을 생각했으나 노름에는 질려 곧 그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