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우리가 왜 훈련을 받고 스스로를 수련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세계의
정당이라는 정당은 모두 당원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여러분이 속한 사회는 하나같이 여러분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요? 정말 훈련이라는 걸 받을 필요가 있는 건가요? 내가 알기로, 우리는 훈련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훈련은, 사회에 의한 훈련, 종교
지도자에 의한 훈련, 도덕률에 의한 훈련, 여러분 자신의 경험에 의한 훈련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큰 일을 성취시키고 싶어하고, 큰 돈을 벌고 싶어하고, 위대한 정치가가 되고 싶어하는야심가에게 있어서는 야심 자체가 자기 수련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훈련이란 꼭 필요한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더러 몇 시에는 꼭 자고, 몇 시에는 꼭
일어나고, 공부는 반드시 하고,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하고, 어머니 아버지 말씀에는 반드시
복종하라는 등등의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여러분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훈련이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훈련이라는
말은, 사람을 어떤 일에 맞춘다는 뜻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어떤 사람의 말에 맞추고,
이런 욕망에는 저항하고 저런 욕망에는 순응하고, 이런 건 하고 저런 건 하지 말고, 겉으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속까지 순응하고, 억누르고, 따르는 것 - 이 모든 것이 곧 훈련입니다. 오랜
세월을 우리는 선생님, 구루, 사제들, 정치가들, 임금들, 법률가들, 우리가 사는 사회로부터 마땅히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자,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훈련이란 필요한 것이냐, 이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다른
접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한 번 따져 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대체로, 능률적이기 위해서는 훈련 -
도덕률에 의한 훈련이건, 정치 강령에 의한 훈련이건, 공장에서 기계같이 일하는 훈련이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훈련 과정은 순응을 통해 우리 마음을 무디게 하고
맙니다.
자, 훈련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합니까? 아니면, 공산주의의 이상향, 도덕적, 혹은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최고 가치 같은 이념적 틀 안에 여러분을 맞추어 넣습니까? 모든 형태의 훈련이
그렇듯이 여러분을 구속하고 가두었는데도, 이 훈련이 여러분을 풀어 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요? 아니면 다른 접근 방식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만 바랄 수도 있는 것일까요?
서로 갈등하는 두 가지 이상의 욕망 대신 하나의 욕망, 다시 말해서 한 가지만 바랄 수도 있는
것일까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여러분에게 두 가지, 세 가지, 열 가지 욕망이
생기는 순간 훈련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고, 자동차와 집을가지고 싶어하는 동시에, 적게 소유하거나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이유에서 이러한 것들을 타개하고 싶어할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교육을 받으면,
상호 모순이 없고, 따라서 훈련이 필요없는 상태로 전존재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요?
완성이라는 개념은 자유라는 개념을 싸안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성된 인간에게는 훈련이
필요하지않습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모든 수준에 두루 통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
니다.
아시겠어요, 어릴 적부터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다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전혀 모순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훈련도 필요없고 강요도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에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전존재를 하고 있는 일에 던져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이란 모순이 있는 곳에서만 필요합니다. 정치가들, 정부, 그리고 조직화한종교는 여러분에게 한 방향의 사고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완전한 공산주의자,
완전한 가톨릭 신자, 혹은 그들이 의도하는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문제를 잃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기계처럼 생각하며 기계처럼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맹목적으로 그들을 따르기 때문에 모순 같은 것이 있을리 없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복종은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복종이란 기계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여유가 전
혀없는, 상황에의 순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릴 적부터 완전한 안정감, 안도감, 말하자면 '이것'이 되어야지 '저것'
이되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과의 투쟁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기는 한 건가요? 내적인 몸부림
이있으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갈등을 해소시키려면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제대로 교육을 받아왔고, 여러분이 하는 일 모두가 완성을 지향하는 행위라면 여기에는 모순도
없고, 따라서 강요된 행위를 하는 일도 없습니다. 완성을 지향하는 행위가 있을 때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이라는 것은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훈련이란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아니기 때문입니다.
완성은, 어떤 형태의 것이든 훈련 같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선한 일을
한다거나, 본질적인 진실에 매달리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에 내 전존재를 던져 넣는다면, 내
내부에는 모순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럴 때 나는 어떤 일에도 순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자체로서 선하고 올바른 일 - 힌두교 전통, 혹은 공산주의 이론으로 보아 올바르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상황을 초월해서 올바른 일 - 을 하고 있다면 나는 완성된 인간이며 따라서
훈련을 받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학교가 할 일이란, 여러분에게 이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하고, 여러분이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옳고, 선하고, 영원한
진실일 수 있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리고, 만일에 여러분이 어떤 일을 사랑한다면 구태여 훈련을 하거나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창조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저항도 없고 갈등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완벽한 사랑은, 여러분이 스스로의 처지를 편하다고 느낄 때나 완전한
안도감을 느낄 때만 가능합니다. 젊을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교육자와 학생이신뢰를 통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만드는 사회는 지금처럼
추악하고 파괴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순이 없고, 따라서 훈련이 필요하지 않는 완벽한
통합 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전적으로 다른 문화, 새 문명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항하고 누르려고만 한다면, 이 저항에 부딪히고 눌린 것들이 필연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여 사회를 해치는 행위, 파괴적인 사건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 훈련이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훈련이란 추악한
것입니다. 창조적인 것이 못 됩니다. 파괴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을 이해하지 마세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사랑하는사람은, 저 좋을 대로 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지향하게 하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며 사랑이 하고 싶어하는 대로 하게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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