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

별관신사 2014. 5. 13. 03:28

혹시 사원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요? 그래 무엇에다 주의를
기울였습니까? 종소리 자체였던가요, 아니면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고요였던가요? 만일에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고요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리가 훨씬 선명하게, 질적으로 다르게 들리지 않던가요?

하지만 잘 들으세요. 우리는 어디에든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삽니다. 나는,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을 아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수학 문제를 설명할 때, 친구가여러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때, 혹은 강가에서 강둑을 때리는 물소리가 들릴 때, 여러분은

대체로 이런 소리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게 무슨 뜻인가를
제대로 안다면 배움은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배우기가 쉬어질
것입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여러분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는 건 무슨 뜻일까요? 창밖을 내다보지
말아라, 다른 데 신경쓰지 말고, 공부하는 것에만 주의를 집중시켜라, 이런 뜻일 것입니다. 소설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여러분의 온 정신은 소설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일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주의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의 폭을 좁히는 과정이 아닐는지요?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른 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강요당하는 주의, 실제로

기울이는 주의, 그리고 주의하려고 애쓰는 것은 관심의 폭을 어떤 지점으로 좁히는 과정, 다시
말하자면 배타적인 과정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할 때 여러분은 이미 무엇엔가 저항하고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고 싶은 욕망,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보고 싶은 욕망 같은 것에

저항합니다. 여러분의 에너지 일부는 이미 이 저항에 쓰여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특정 주제에
정신을 완전히 집중시키기 위해 정신 주위에다 장벽을 쌓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주의를
집중시키는 훈련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모든 생각을 마음에서 몰아내버리고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주의를 집중시키고 싶은 곳에다 남겨 두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일컬어 주의를 집중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종류의 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배타적이 아닌 마음의 상태, 어떤 문도 걸어 잠그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은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배타적인 상태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 주의가 몰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 싶은 주의는 우리가 흔히 주의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내가 말하는 주의는 배타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의 폭이 엄청나게 넓습니다. 어떤 주제,
이야기, 혹은 대화에 정신을 집중시킬 때 여러분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끼여드는
다른 생각에 저항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은 바라는 곳에 온전하게 쏠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 기울여지는 주의는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마음의 일부는,
끼여드는 다른 일, 탈선 혹은 분산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다른 쪽에서 시작해 봅시다. 분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읽고 있는 책에

주의를 집중시키려 하는데도 마음은 바깥의 소음이나 바깥을 내다보고 싶은 욕구 때문에
분산됩니다. 어떤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싶은데도 자꾸만 마음이 흩어지는 상태를 분산이라고합니다. 이럴 때 여러분 마음의 일부는 이른바 분산 현상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이 저항 과정

에서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반면에 여러분의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걸 자각한다면 분산 같은것은 있을 턱이 없고, 마음의 에너지가 저항에서 소모되는 일도 없습니다. 진짜 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종소리와,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고요에 동시에 귀를 기울일 때, 이 상태가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말을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이 말 자체뿐만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침묵에도 쏠리는 것, 이것이 바로 주의가 쏠리는 상태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연습해

보세요. 분산되는 일도 없고 저항할 필요도 없이 주의가 한 곳에 쏠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창밖을 내다보지 말아야지, 딴 짓을 하고 싶지만 꾹 참고 주의를
기울여야지." 이런 말로 자신을 훈련시키면 일종의 분열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건 아주

파괴적입니다. 왜냐하면, 에너지를 낭비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따라서 어떤 형태의 저항도 생기지 않도록 범위를 넓혀서 들어보세요. 그러면 힘 안 들이고도 주의를 완전하게 기울일 수 있게 된다는 걸 깨달을 것입니다. 내 말 알아듣겠습니까? 내가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주의를 기울이려고 마음을 훈련시킨다는 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말하자면 마음을
악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원숭이처럼 풀어놓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몰입의 경지를 제외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이 두 가지 상태뿐입니다. 말하자면,탈선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단단히 훈련시키려고 노력하는 것, 혹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양자간의 절충이 아닙니다. 천만의

말이지요. 이 두 가지 방법과는 아무 볼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선 접근 방법부터가 다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늘 마음이 어느 한 곳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한 번 해 보세요. 그럼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음이 이런 데 익숙해진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노래나 소리를 듣되 들으려는 노력이 없이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을 온통 거기에만 기울일 수 있습니다. 결국,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알면, 여러분 마음에 공간과 고요가 있어서 분산되지 않고 따라서
아무 데도 저항하지 않고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선생님이 말하는 역사적 사건뿐만이
아니라, 그가 이 사건의 해석에 덧붙일지도 모르는 편견과 여러분 자신의 내적인 반응까지도

의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 한 가지 더 하지요. 여러분은 공간이 뭣인지 알 것입니다. 이 방에는 공간이
있습니다. 이곳과 여러분이 묵는 기숙사, 다리와 여러분의 집, 강의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

이 사이에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에도 공간이 있습니까? 아니면, 공간은
커녕 잡다한 것으로 꽉 차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공간이 있고 그 안에 고요가 있어도 그
고요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주의를

쏟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잡다한 것으로 꽉 차 있지 않다면, 끊임없이 선입견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개 짖는 소리, 먼 곳의 다리 위를 지나는 기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마음은 살아있는 마음이지, 죽은 마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