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는 모두 이 속임수의 제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속임수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이웃이 악한
이며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대가 이를 곧바로 믿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악한이며 부도덕하다면
그대가 갑자기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그대의 이웃이 도덕적이며 성자연
한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를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증거를 대봐 !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그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는 우리 이웃인데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아 하고 말한다.
누구인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적의에 찬 의견을
말할 때마다 그대는 이를 즉시로 믿는다.
그대는 결코 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 세상에 쑥덕공론이 그렇게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호의적인 말을 한다면 그대는 즉시
경계를 한다. 왜 그럴까? 그가 선하다면 그대가
돌연 악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거기에 성자가
있다면 그때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한낱 바보일 뿐이다. 만약 거기에 성자가
있다면 그대는 죄인이다. 그대는 의식적인 속임
수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임수는
이렇게 진행된다. 거기에 그대가 성자가 되던가
아니면 아니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두가지 길이 있다. 철학은 계속 그런 속임수를
행하고 있다. 그대에게 바람이 있을 때 마다
그대는 세상을 부정한다.
오쇼의 신심명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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