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으로 가는 명상.

철학은 상대적으로 하나의 속임수에 빠지게 한다.

별관신사 2020. 12. 10. 10:07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이 속임수의 제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 속임수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이웃이 악한

 

이며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대가 이를 곧바로 믿는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악한이며 부도덕하다면

 

그대가 갑자기 도덕적으로 선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누가 그대의 이웃이 도덕적이며 성자연

한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를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증거를 대봐 !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그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는 우리 이웃인데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아 하고 말한다.

 

누구인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적의에 찬 의견을

말할 때마다 그대는 이를 즉시로 믿는다.

그대는 결코 이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이 세상에 쑥덕공론이 그렇게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호의적인 말을 한다면 그대는 즉시

 

경계를 한다. 왜 그럴까? 그가 선하다면 그대가

돌연 악해지기 때문이다. 만약 거기에 성자가

있다면 그때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한낱 바보일 뿐이다. 만약 거기에 성자가

있다면 그대는 죄인이다. 그대는 의식적인 속임

수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임수는

 

이렇게 진행된다. 거기에 그대가 성자가 되던가

아니면 아니면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두가지 길이 있다.  철학은 계속 그런 속임수를

 

행하고 있다. 그대에게 바람이 있을 때 마다

그대는 세상을 부정한다.

 

                                  오쇼의 신심명 강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