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는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경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실재가 단순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뒤에 무라는 순수한 진공
분별할 수 없는 일원성의 혼돈만 남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즈키 선사는 공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언급한다.
공은 다양성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산이 있고 벚꽃이 반발하며 가을 밤
달빛은 휘영청 밝게 빛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개별적 존재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더욱 깊은 의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들은 자신이 아닌것들
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된다. 세계의 경계를
공으로 볼 경우 모든 사물과 사건이 모든 대립과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핵심이다.
즐거움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고 산은 악과
삶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것은 그것이 아닌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아담의 주문에 걸려 있어서
경계를 마치 삶 자체인 것 처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가 무경계라고 하는
통찰의 진수는 어무나 단순한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단순성 때문이다. 예컨대 시야의
예를 들어보자 자연의 풍경을 죽 훑어 볼 경우
눈을 홀로 분리된 단일한 사물을 보는 것일까
과연 눈은 한그루의 나무 한개의 파도 한마리의
새를 본적이 있기는 한가? 아니면 나무에 하늘이
더해지고 거기에 풀과 땅이 다시 더해진 파도에
모래가 더해지고 거기에 다시 하늘과 구름이
더해진 맞물려 짜여진 온갖 종류의 패턴과
조직이 만들어 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회경을
보는가?
캔월버의 무경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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