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알힐티(Carl Hilty)는 1833년 2월 28일 스위스 동부 장크트 카렌주의
베르텐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한 우르리히 힐티는 매우 교양있는
유명한 의사였으며, 어머니 엘리자벳 칼리아스는 교양있고 신앙심 깊은
여인이었다.
6세때인 1839년, 힐티는 소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서 그는 겸손하고
성실하고 근면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알게 되었으며, 약한 자에 대한
동정심과 이해심이 길러졌다.
1844년 11세때, 그는 주립인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종교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형식적인 종교교육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고전학에 몰두했다.
18세때인 1851년, 그는 김나지움은 졸업하고 독일의 고팅겐대학에 입학하여
법률학과 철학. 역사학을 공부했다. 이시기에 그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싸움을 하기도 하며 독일 각지를 도보로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852년,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법률연구에
몰두했으며, 독서에도 열중했다.
21세때인 1854년 4월,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그는 런던, 파리에 유학하여 자유롭게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도서관에 다니기도 하며 법률학 공부를 계속했다.
이듬해인 1855년, 힐티는 퀴일시로 돌아와 변호사를 개업했으며, 그 이후
18년동안 이 직업에 전념했다. 그는 가장 유능하고 정의감 있는 변호사로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특히 그는 자기의 직업이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중요시하여, 거기에 합당한 도덕적 정신과 교양을 쌓기 위해 바쁜 가운데서도
독서와 사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정한 자들로부터 선량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보수를 받지 않거나 매우 싼
보수로 일하는 것을 그의 원칙으로 삼았으며, 도덕적으로 부정한 사건은 일체
맡지 않았다.
1857년, 그는 요한나 게르트너와 결혼했다. 그녀는 독일의 명문가의 딸로서
그녀의 아버지는 본 대학의 국법학자인 스타프 게르트너였으며, 그녀의
할아버지는 프러시아의 유명한 법률가인 동시에 궁정 고문관이었다. 요한나
게르트너는 재덕을 겸비한 훌륭한 여성이었으며, 항상 힐티를 도와 서류를
정리해 주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40년 동안의 행복한 결혼생활후
그녀는 힐티가 죽기 12년전인 1897년에 죽었다. 힐티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만일 내세가 있다면, 내가 다시 결합하고 싶은 것은 오직
요한나뿐이다.>라는 그의 말로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국가의 관습에 따라 육군에 입대하여 법무관으로서 일했으며,
후에는 육군의 재판장이 되어 육군 사법의 지도자로서 많은 재판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학문연구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1868년, 그는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사상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1873년 그는 베른대학의 정교수로 초빙되어 국법학과 국제법을 강의했다.
그는 대학 교수직을 학문연구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인격을 육성시켜야 하는
직책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학생들에게 법률학 강의를 하면서 자기의
경험과 독서로부터 얻은 풍부한 지식을 학생들의 마음 속에 심어 주었다.
그의 강의실은 항상 학생들로 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1890년, 그는 고향인 베르텐베르크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후 20여년 동안 죽을 때까지 그 직책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입장을 취했지만, 때로는 당의 모토를 초월하여 발언하기도 했다.
특히 풍부한 역사적 지식과 뛰어난 정치적 식견으로 인해 반대당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발언할때면 모든 의원들이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1899년, 그는 국제법의 대가로서 국제 사법 재판소의 초대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에 평화 회의에서 <이 회의의 규모는 매우
크지만 그 활동은 오히려 미미하다. 영국과 독일 사이의 경제경쟁, 나라들
사이의 세력다툼등은 어떠한 평화 회의도 제거되지 않는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각 개인들 사이에서
성립하여, 그 후에 국민들 사이로 확산되지 않으면 달성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1909년 9월말, 그는 휴가를 얻어 쥬네브 호반의 어느 호텔로 휴양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조용히 독서를 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고, 호반을
산책하기도 하며, 한가로운 날들을 보냈다. 10월 12일, 그는 여느 때처럼
아침 독서를 마치고 오후에 산책을 나갔다. 그는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의사의 진단은 심장마비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성서와 그의 최후의 논문인 <영원한 생명>이 놓여 있었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힐티는, 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이며, 육군법무관이며, 역사가 였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항상 정력적이고 근면했으며, 그의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도 정연했다.
그는 그리이스 로마고전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에피크레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애독했다. 그러나 그에게 항상 가장 큰 감화를 주고, 그가
가장 애독한 것은, 성서였다. 그는 프랑스어, 영어등에도 능통하였으며, 단테,
카알라일, 데니슨 톨스토이등 실로 다양한 독서를 했다. 그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죽은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교제했으며, 현대인들보다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보다 잘 이해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매우 정력적인 저술가 였다. 1868년 정치학 논문을 발표한 이후
죽기 직전까지 40여년간 법률학, 정치 역사, 사회문제, 종교, 윤리 등의 분야에
걸쳐 수많은 논문과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에는 행복론, 잠못이루는 밤을
위하여, 신서간집, 독서와 연설, 병든 영혼, 영원한 생명, 힘의 신비,
그리스도의 복음등이 있다.
힐티의 사상의 특색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힐티의 기독교 신앙에는 속죄의 관념이 거의 없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만인의 속죄라는 교의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속죄란 각 개인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즉, 교회에서의
집단적인 예배와 기도의 형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직접
신을 믿고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끊임없이 신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것을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불행은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인생 최대의 행복은 신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연구나
사색의 성과가 아니라, 그의 전인격의 용출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그대로
그의 행위이며 생활이었다. 그의 문장이 독자들의 마음에 큰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연보>
1833년 스위스 동부 장크트 카렌주의 베르텐베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다.
1839년 소학교에 입학
1844년 (11세) 주립인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종교교육을 받음.
1851년 (18세) 독일의 고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법룰학을 공부하다.
1852년 (19세)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하여 법률학을 공부하며
독서에 열중하다.
1854년 (21세)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졸업하다. 런던 파리 등으로 여행하다.
1855년 (22세) 변호사를 개업하다.
1856년 (23세) 보병 연대에 입대하여 법무관으로 일하다.
1857년 (24세) 요한나 게르트너와 결혼. 그녀의 나이 18세 였음.
1863년 (30세) 단테의 신곡을 읽고 큰 감명을 받다.
1868년 (35세) 민주주의 정치의 이론가와 사상가라는 논문을 발표.
1873년 (40세) 베른대학의 교수가 되어 법률학을 강의하다.
1886년 (53세) <스위스 연방 공화국 정치연감>을 저술.
1891년 (58세) <행복론>제 1권을 씀
1892년 (59세) 스위스 육군 주석 법무관에 취임
1895년 (62세) <독서와 연설>, <행복론> 제2권 저술
1897년 (64세) 아내 요한나 죽음
1899년 (66세) 국제 사법 재판소의 스위스의 초대대표가 됨.<행복론>제3권 저술
1901년 (68세)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제 1권 저술
1902년 (69세) 베른 대학 총장에 취임.
1903년 (70세) <서간집>저술
1906년 (73세) <신 서간집>저술
1907년 (74세) <병든 영혼>저술
1908년 (75세) <영원한 생명>저술
1909년 (76세) 쥬네브 호반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다.
1919년 (사후 10년)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제 2권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