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12월 31일

별관신사 2015. 2. 2. 19:03

이제부터는 오로지 정의와 선에 봉사하겠다. 더욱이 그럴 기회가 구하지
않고도 나타난다면 기필코 그렇게 하겠다.>고 일단 굳은 결심을 하였다면
- 이것은 분명 모든 <좋은 계획> 중에서 가장 도리에 합당한 것이다. -

그로부터는 날도 달도 계절도 해도, 아니, 생애의 황혼의 대다수의 사건조차도
무관심해지게 되고, 달력도 거의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주로 향락을 기대하고 활동을 기대치

않는 자에게 있어서만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럼, 안심하라. 당신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지혜나 가르침 따위는 없어도 되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주 저절로, 즉 정화된 본성의 자연스러운 충동과 경향으로
언제나 정의와 선을 생각하고 또 그것을 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단테 <신곡> 연옥편 제 27곡 110-142행

그렇게 되었거든, 신이 당신을 위해 하신 수고에 대하여, 또 가까스로
목표에 이른 당신의 생애에 대하여 신에게 감사하라.
그럼, 그날까지 안녕. 또 그렇게 되기 위해 용기를 갖기를.

다만 예컨대 아르립파 왕처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사도행전 26:28)>하는 따위의 말은 결코 하지 말라.
이같은 냉담하고 어중간한 동의는 이 아그립파의 실례(바울의 예는 이와

정반대이다.)가 보여주듯이, 노골적인 반대보다도 더 한층 절망적인 것임을
명심하라.


<당신은 건강해지고 싶은가>
(요한복음 5:6)
현대 종교교육의 결함의 하나는 아마도 그 교육이 사람들로 부터 이미 이
세상에 있어야 하며 또 있을수 있는 대로의 생활을 찾아내기 위한 용기와
희망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그 대신에 내세에 대해서 설명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내세에 대하여 유일한 신빙성이 있는 증거인 복음서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뿐이며, 그것이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 지는 모르는 것이다.

분명 구약성서는, 때로는<결혼한 땅(신과 인간이 남편과 아내처럼 하나로
맺어졌다는 뜻)>에 대해 분명히 말했고, 이미 이 지상으로부터 거기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더욱이 실행할 수 있는 임무임을 말하고 있다.

단테도 <신곡>연옥편의 끝머리 몇절을 이 <지상 천국>의 멋지고 아름다운
묘사에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천국생활에 대한 다소 애매한 서술보다도
훨씬 직관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모든 사람들의

사상세계는,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 세상의 생애가 끝난뒤에 더욱 행복과
기쁨이 많은 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도저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 경우
양자의 사고방식의 차이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한쪽 사람들은

피하기 어려운 일체의 존재 끝에 다소간 체념으로써 복종함에 반하여,
다른사람들은 죽음을 통하여 멸망의 최저 단계로부터 생명의 최고 단계로
비약하고자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1.
이스라엘의 예언자 이사야가 그의 <베우라(결혼)>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했는가는 완전히 명백하지는 않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영혼의
의지의 점으로 보아 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자아의 모든 내적

저항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자각에 도달한 그런 영혼의 경지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온갖 원인으로 생기는 외적 저항은 결코 영혼을 어둡게 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에 대하여 항상 준비된 신의 도움이 있으므로, 이미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다만 이 도움에 대해서는, 자유로와진 인간이 그에게
있어서만 권위있는 보다 높은 근거에서나, 또는 남을 위해서나 더욱 그

도움을 구하고자 하느냐 않느냐가 문제이다.
겉으로만 기독교에 속해있는 문명국 사람들이, 지금은 아직 그렇지 않지만,
그리스도교의 이같은 (내세에 대한) 약속을 진실로 간주할 시기가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이미 다른 어떤 것도 결코 기독교보다 더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므로 할 수 없이 그러는 것이겠지만.
왜냐하면, 그렇지 못하면 오직 온갖 우연에 내맡겨져 있는 이 인생에

있어 인간은 불가불 뭔가에 의지할 수가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런 확실한
도움이 없다면, 자기 힘이나 지혜에 즉 <정당한 이기주의>의 조직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기주의가 어느 한계까지 옳은가

확인하기는 어려우며, 더욱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모든 악은 다름아닌
바로 그 이기주의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천하만국(마태복음 4:8)>이 언젠가 저절로 멸망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만국에 있어서, 평화와 기쁨을 만인을
위해서는커녕 다만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만이라도 구하는 것은,
문화의 커다란 진보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인만이 지니고 있는 환상에

불과하다.
이같은 문화가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한 상황에 있는 경우에 빚어내는 것은
스펜서, 러스킨, 에머슨, 카알라일, 괴테류의 되도록 선의적인 처세지의

철학이다. 현대에도 교양인중 빼어난 사람들은 아직 이 철리에 따라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 철리는 그것이 아주 행복하고 질서 있는 상황이 유지된
경우에만 대략 그대로 수행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따금 염세주의나

은둔주의로 전락할 커다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인생의
기쁨으로가 아니라 그저 체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주 보통이다. 설혹 그런
사상이 진리를 말할 경우라도 그것은 차원이 낮은 진리이며, 보다 높은

진리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교양인 중에서 특히 재능과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흔히
걷는 인생 행로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잘 진행된 경우에도 그 최후를

장식하는 것은 기껏해야 불확실한 <동료의 갈채>에 불과하다. 이것이
곧 고대 문화세계의 전제군주로 위대한 성공을 거둔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임종 때 친구에게 요구했다고 일러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애수에 찬 사세구가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대는 그 외면적 문화의 점에서 현대와 아주 흡사했으며, 미개민족의 침입에
앞선 문화의 절정기였으나, 그는 자기 영혼과 작별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불안하고 상냥하며 변덕스런 영혼이여, 육체의 주인으로서의 동료여,
너는 이제부터 저쪽의, 색깔도 움직임도 없는 황량한 나라로 간다. 거기서는

네가 사랑했던 밝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고전적 교양을 닦은 대다수의 사람들도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원숙과 기쁨에 충만한 노년에 대해서건, 또는 보다 좋은 내세의

생활에 대해서건 진짜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체로 사물을 생각하거나
관찰하거나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주변에서 이런 사례를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또 하나의 인생행로는 신의 <인도>에 의한 생활이다.
그 인도가 약속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품을 것이다.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내리라(이사야 46:4)>,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이사야 27:5)>, 너희가 우로 치우치든 좌로
치우치든, 네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도이니

너희는 이대로 행하라 할 것이라(이사야 30:21)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리라 (이사야 32:18)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과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29-31),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그러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
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사랑하리라(이사야 41:11),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못하겠느냐. 정녕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야 48:18),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이사야 46:11) 보라 내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하던 자들이다.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 앞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느니라(이사야 51:22),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다.
무릇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이사야 54:14)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이사야 58:11),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이사야 6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라(이사야 65:23.24),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이사야 66:13.14)
이와같은 신에게 인도되는 생활과 세상의 보통 생활과의 차이는,
전자에게는 불안도 없거니와 기분풀이나 많은 휴양도 필요없으며, 마지막에는
자기기만의 필요조차 없고, 항상 상황이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 외적인 사물을 바꿀수가 있다는 또는 아무런 해도
입는 일이 없이 그것들에 견딜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들은
항상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틀림없이 좋은 것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 길을 걷고 있으면 건강이나 불굴의 힘 조차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바로 이 길에서 더 자주 주어지는
것이지만. 몸이 약한 사람이나 병자들도 늘 즐겁게 활동할 수가 있으며,

인류를 위하여 다른 길을 걷는 가장 건강한 사람보다도 더 훌륭한 일을
이룩하는 일이 많다.
자, 이제 선택하도록 하라. 당신은 이 두 길 중에서 마음대로 택할

수가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현대에도 또다시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대다수가,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교양있는 중류계급의

과반수가 실제로 걷고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열왕기 상 2:2)-
만일 당신이 이런 길을 택한다면 당신의 운명이 이따금 가혹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더라도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그런 운명을 바라고 또 동일한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에게 따른 것이니까.
이에 반하여, 만일 당신이 기독교의 길을 택한다면, 다음 사실을 확실히
알아두기 바란다. 즉, 지금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나 교회의 여러 형식을

크게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전하고 자연 그대로의 마음에 기쁨과
인내력을 주며, 그리고 누구에게나 호의를 갖는 기독교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같은 기독교는 거의 자명한 것으로서 꾸준히 신앙을 일깨울

필요는 없고, 기회가 나타날 때마다 선한 일이나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고 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동경하고,

가까운 장래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기독교이다. 왜냐하면
이보다 우월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만이 현대의 세계를 유효하게
개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현대의 교양있는 계급의 사람들은 보통 마음의 건강보다도 육체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인용한 이사야 66:13,14는 육체의 건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진정한 신은 육체의 병의 주인이기도 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주 명확하다. 다음으로 그것은 차치하고, 미리 마음의
침착과 의지의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무수하고 더욱이 나날이
증가해 가는 신경병이나 정신병의 대병력을 다만 의학적 방법만으로

치료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러나
이러한 병이나 그밖의 많은 병의 참된 원인은 좀더 깊은 데에 잠복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건강과 체력을 위험할 정도로 잃어가고 있으며, 만일
이제 새로이 민족이동의 내습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에 버티기 힘들
것이다. 더욱이 이 상태는 어떤 과학이나 기술로써도 이미 본질적으로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퇴화가 심해지지 않도록 막을 수도 없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교양있는 계급의 사람들이 모든 건강한 육체적 생활의 근저에
있는 도덕률로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도리밖에는 없다. 이미 모든 문명국민의

많은 가정에는 도덕률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갖가지 형태로 아주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태가 건강의 장해가 눈에 띄게 올 것이다.
개선의 시작은 불가불 철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건강

위생학만으로는 도저히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가 없다. 이 경우 근본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답하는가로 장래의 의학과 철학의
형식이 결정된다. 즉 정신과 육체의 밀접한 관련은 차치하고, 무릇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아니면 정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다만 육체적 기관의 하나의 기능에 불과한가 아닌가. 그리고 앞의
경우(정신이 존재한다 치고),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더구나 육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보다도 오히려 그쪽이 훨씬
강하지는 않은가, 적어도 그것이 가능하지는 않은가 등등이다.
이 문제야말로 현대의 유물론과의 싸움의 초점이라고 생각된다. 유물론이

맹위를 떨칠때에는 언제나 불행을 빚어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의학계에서도 거의 저울대가 차츰 유물론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건 작건 병을 지배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으며, 의사는 불가불 이 힘의 협력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다음과 같은 반대론만은 아직 해결되고 있지 않다. 즉
일반적으로 병자에게는 정녕 이 정신력이 결여되어 있어서 자기 안에서 그

힘을 낼 수가 없으며, 또 의사나 간호원의 설득이나 암시만으로는 그 힘을
얻을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면 결국
논리적으로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해야 할 터인데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밖에 있으므로 사람의 힘은 아니지만
사람의 힘이 되어 그 안에서 작용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상주의적 사유의 사슬을 더듬어 가면,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최후의 고리이다. 만일 이 최후의 결론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유물론은 그 모든 필연적인 피치 못할 비참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계속
지배해 나가게 된다.


3
현대의 교양있는 계급을 보면, 그 인간생활은 또다시 단테가 그 <신곡>
첫머리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은 회의와 착각과 사로가 뒤엉켜 있는 그
어두운 숲을 닮고 있다. 현대 문화의 모든 요소, 즉 철학, 문학, 예술, 더구나

일부 신학까지도 이 혼란에 한몫 거들고 있으며, 이 미로로부터의 탈출을
용이하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에 반하여
대부분의 교양이 없는 사람이나 모던한 사이비 교양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건전한 정신생활에 지장을 주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이다. 사실
사회주의는 많은 기존의 것들에 대하여 분명 정당한 공격을 가하고 있으나,
동시에 무신론의 기초 위에서 유용한 철학을 수립하고자 하여, 그 무능력한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열심히 진리를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왕왕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같은 위안 없는 사상의 황야를
어처구니없게 침착성도 없이 방황하고, 그때그때 이쪽 저쪽의 학문의

<체계>로부터 확신을 얻고자 안달하고 있다. 한편 그만큼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자는 천박한 향락을 추구하면서 범속한 생활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니이체가 똑바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듯이, 전자(훌륭한 재질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는 얼마쯤의 건전한 양식의 빛만은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이 빛은 그 사람의 선의로 인하여 신의 은혜로써 그의 내부에서

꺼지지 않도록 지켜지고, 적어도 세속적인 인간생활의 불행을 차츰 그에게
밝혀 준다. 만일 그 사람이 진실하다면, 이로 인하여 이윽고 차츰 지옥의
심연에서 빠져나와 정죄의 산의 좁고 험한 길에 나서게 나서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에는 거의 증오하고 있던 생활이 이제는 산뜻한 공기와 밝은
햇빛과 기슭의 모든 인가들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전망을 갖는 아름답고 탁
트인 산꼭대기처럼 생각되어 온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애써 왔던 모든

철학 공부나 피상적인 교회생활따위로부터 그에게 남는 것은 오직 신과
우리의 주에 대한 진실한 사랑뿐이다. 다시말해서 분명히 존재하고,
지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으나 쉽사리 또 명료하게 실감할 수 있는 모든 선의

원인이며 근원적 힘인 신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일찍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보이지 않으면서 항상 지상에 친히 임하는 이 성령의 화신인
우리의 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남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으로부터

(이제 인간의 지시나 의견에 별로 시달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거울에
비추어서 살고자 하는 노력과 능력이 그야말로 저절로 용솟음친다. 이것은
질곡에서 벗어나 자립으로까지 눈뜬 영혼의 비할 바 없는 행복한 감정이다.

이같은 영혼은 인생의 중대사인 죽음에 대해서도 이미 승리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이미 다른 것으로부터의 어떤 해도 가해지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어떤 길을 통해서도 이룰 수 없는 지상 생활의

정상일 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전혀 별개의 생활 단계로 자연스럽고도
분명하게 진입하는 유일한 참다운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밖의
사상과 심정으로써 <천국>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또 분명히 모두

지상의 성격을 띤 것에 불과하고, 이 세상을 위해 정해져 있는 우리의 학문적
노력이나 교회적 활동을 그대로 천국으로 가지고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세의 걱정거리나 <이 세상의 시시한 잔소리>에 잠겨 있던

생활로부터 갑자기, 그것도 자기 것도 아닌 공적으로써 전혀 다른 상태로
옮겨진다고 믿을 수도 없다. 세상에는 그 생활 전체가 사실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생애의 사업과는 하등 무관하며, 실제로는 늘 다른 신들만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너무도 뻔뻔스런 이익을 뽑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까지도 <그리스도의 희생이 죽음>이
구제력을 갖는다는 이른바 경건한 사람들의 생각은 우리의 견해와는 정반대로

다르다. 또 은총의 나라에서도 그처럼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인생의 다른 보배보다도 이
은총을 택하고, 그것을 입고 싶다는 의지를 이 세상의 생활에서 이미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 비록 그 의지가 대체로 주기적인 것에 불과하고,
가끔 미혹이나 중단을 수반하는 것이며, 때로는 이 의지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까스로 나타나는 것일지라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교양인을 설득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시킬수가 있어야
한다. 즉, 초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신앙이 없으면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나 또 자손을 위해서 육체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조차 없음을 확신시켜야 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진정 선량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용기를 되찾아 주어야만 한다. 사실 이같은
용기는 현대인들로부터 이미 아득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앞에 인용한 대로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그런 시대가 이윽고 다시
올 것이다. - 이것은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고 싶다.
'그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할 것이며, 사람들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강폭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망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으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이사야 29:18-20)'
이상이 전 인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이밖의 희망을 갖지

않는다. 참 생명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는 저마다 5,6세기경의 어느 고대
철학자(보에티우스:그리스도교적 철학자. 다음의 시는 이른바 보에티우스의
기도에서 인용한 것임)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우주의 존재를 지배하며,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태초부터 시간을 이끌어 주신
아버지이신 신이여, 우리도 쾌청한 높이로 오르게 하소서.
빛을 우러러 환성을 지르고, 행복의 샘물에 배부르게 하소서.
재앙과 지상 물질의 무거운 짐에서 풀려나,
영의 정복의 눈을 영원히 당신 쪽으로 향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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