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칸트의 미학은 어느정도 교육받은 부르조아 계층의 미적의식을 정당화
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칸트가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것은
아니였다. 칸트는 단지 자신의 미적 경험을 반성험으로써 아름아움이 인간의
무관심한 관조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일반화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
부르조아계층의 일원으로써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미학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였지만 자신과 사회적 신분이 동일한
사람들 즉 당시 특정한 도시의 부르조아계층에게만 적용될만한 것이였다.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누드화를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성적인 흥분이나 동경을 마음에 품고서 있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르조아계층 사람들이 단지 무관심
하게 누드화를 볼 수 잇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예외적인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인데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개 자신들이 미술관에서는 성적인
관심에 무괸심한 척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그래서 아름다움 즉
칸트의 미학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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