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이때 [인생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 나타난
그의 순진함과 현명함은 소냐의 마음속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그 논문을
옮겨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혼의 접근에는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었고 또 소냐의 생각과
행동에 별다른 변화를 끼치지는 못했으나 톨스토이의 주위(主義)를
부정하거나 인격을 경시하는 일을 없었다. 톨스토이는 완전한 일치를
마음속 깊이 원하고 있었다. 그는 소냐 에게 손을 내밀어 자기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해주도록 그녀의 혼을 높여주고 싶다고 갈망하기도
하였다. 그의 마음 속의 모든 사랑을 소냐 에게 바치려 했었던 것이다.
1891년 소냐 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 때의 그처럼 기뻤던 인상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소.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심정이
된다오. .....당신이 강해지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기필고 나의 사랑은 있는 것이며, 존재할 수
있는 한의 사랑은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해 주오. 나는 끝없이 당신을
생각하고서는 가엾게만 된다오.」
소냐는 한때 그만 두었던 필사(筆寫)를 다시 생각했다. 톨스토이는
소냐 에게 복사해 주기를 부탁했고 그녀의 솜씨를 끝없이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톨스토이는 자녀들에게도 어렴풋한 공감과 이해의
징조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또한 그의
사상 가운데 두 가지가 실현된 것도 기쁨이었다. 즉 모든 소유물을
버렸으며 문학 작품의 제작과 포기에 대해 아내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제한은 약간 있었다. 그로서도 아내와
가족을 무일푼으로 내어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1880년 이전의 작품에
대해서는 소냐를 위해 자작권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제 2의 정신적 탄생
이전에 출판된 것들이었다. 그 이후는 자기가 쓴 것을 더이상 판매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사상이나 감성(感性)을 그린 방법으로 매매한다는
것은 자기의 몸을 파는 것과 같이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소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동의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넋 속에는 가령 그녀에 대해 사랑 때문일지라도 양보해서는 안될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었다. 같은 해 그는 지주의 지위에서 해방되었다. 톨스토이의 꿈은
재산을 분배한 다음 그 가족이 농부 생활을 하는 것이었으나 소냐의
동의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언가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 재산을 아내에게 위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소냐는 찬성하지 않았다. 「무어라고요? 당신은 소유권을 악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그 악을 나에게 떠맡길 작정입니까?」라고 항변했다. 결국
재산은 그를 사망한 것으로 가정하고 상속권을 가진 자가 유산을 상속하고
분할하기로 하였다. 부동산이 사정(査定)되었고 소냐와 자녀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재산이 각각 분배되었다.
그후 톨스토이는 사랑하는 민중에게 둘러싸여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노동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생활과
자기가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상에 자녀들이 공명하고 있음을 기뻐하고
행복해했다.
그는 겨울이 되면 서재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의 생활에
깊숙이 젖어든 사람은 비류우코프, 콜보노프, 첼로코프, 승려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슈밋트였으며 그의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1895년 3월, 가장 많은 애정을 쏟고 있던 막내 아이의 죽음으로
톨스토이와 소냐는 자신들의 죽음보다 더 슬퍼하며 괴로워했다. 특히
소냐의 절망은 아주 심해서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광신적인
시기도 있었으나 거의 매일 기도와 교회 다니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이때 그는 지금까지 없었던 동정심을 소냐 에게 보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강인한 성격과 그의 어깨에 걸려있는 사명이 그러한 것을
계속하게 하지 않았다. 내면적인 노고, 자신과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현실 생활에 있어서의 사건에 의해 그 노력이 둔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쇠약해지고 불행해감에 따라 집을
나가겠다는 꿈은 실현될 수가 없었다. 그는 소냐가 말한 대로 아내의
혼의 비호자였다. 그러나 소냐는 그 보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생활을 바꾸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많은 친구들이 신념을 갖고
살게 하기 위해서 그는 가족과 헤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저서를 통해 그의 방식으로 그의 생활을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톨스토이의 하녀가 테이블 위에 은식기를 나열하고 흰 장갑을 끼고
시중드는 그의 생활을 보고 또 테니스에 흥겨워하는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실망과 고뇌의 빛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환멸을 글로 써보내 언행불일치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난을 하는 사람이 참된 벗이라고 생각하고
그들 이상으로 준엄하게 자기를 비판하고 나서 회답을 썼다. 만일 자신과
비슷한 생활을 하며 자기의 주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라고 부를 것이다라며 그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되풀이하며 그렇게 말하였고 자기 몸에 내리는 서릿발같은 비판에
얼어붙은 듯 그는 자기 생활을 심각히 반성하였다.
1897년 6월 8일 그는 부인에게 자기의 가출 이유를 분명히 적긴
하였지만 그의 가출은 그후 13년 후에 이루어졌다.
1908년의 일기를 보면
「괴롭다. 비통하다. 최근 끊임없이 열이 난다. 이럭저럭 참고는
있으나 아마 죽게 될 것 같다. 확실히 사치라는 어리석은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다. 그 속에서 나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또 거기서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괴로워진다.」
「.....지금까지도 여전한 괴로움의 계속이다.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생활은 온통 독(毒)에 젖어 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것은 수치와
고통뿐.」
「내 마음 속에서 고통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한다. 주위의 지나친
빈곤과 비참에 비해 이 무분별한 사치라고 하는 기만(欺瞞), 모든 것이
지독하게 될 뿐이다. 괴로워질 따름이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알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
그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무언가 뜻밖에 찾아와
이 모순에 찬, 용서받을 수 없는 생활에서 자기를 구해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불의의 사건은 무엇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아내는 승리를
의식하고 마음놓고 뜻대로의 생활을 밀고 나가 남편의 의식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소냐는 자식의 죽음으로 커다란 슬픔을 맛본 뒤 도처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했지만 불안한 마음의 병적인 흥분을 안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점점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
착란은 그러한 에고이즘의 모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언제나 자기의 모든 것은 남편에게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더우기
결코 그 되돌아보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병적인 옹고집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무어라고 말했을까, 또 앞으로는
무어라고들 말할 것인가, 크산칫베(소크라테스의 아내, 악처로
유명)라고는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불안에 집착된 소냐는 톨스토이가
매일 쓰던 기록을 모두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미래에, 자신에 관한
나쁜 인상을 줄만한 대목을 모두 삭제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또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일이 됐건 그녀를
비난하거나 비평하려고는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까지 자기 변호를 하며
남편을 따르지 않았던 이유를 끈덕지게 지껄였으며, 길을 잘못든 것은
남편 쪽이라고 그 증거를 들이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은 그런 행위를
이르게 한 자기의 모든 시도가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서(淨書)로 남편을 돕던 일도 거부하였다.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되자 갑자기 그녀는 자기가 따돌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기에게 도움을 받을 여지도 주지 않고 바로 옆에서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을 말없이 곁눈질로 보면서 화를 냈다.
이렇게 되자 모든 사람들은 숨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와
톨스토이의 비서는 타이프를 치다가도 그 방 앞을 소냐가 지날 때면 손을
멈추었고 복사 중인 원고를 숨기기도 하였다. 소냐의 날카로운 눈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분격하여 심한 발작이 계속 일어나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로서는 이러한 상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거듭되는 불면증으로 고민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참아온
정신적 고통이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고뇌를
인생의 과오에 대한 응보로서 달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것을 거기서 찾아내려 한 것이다. 1910년 6월 16일 일기에
「벌이 이처럼 가벼운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썼다. 그는 아내가 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코비키 박사를
포함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소냐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정신은
정상인데 목적을 달성하려는 방법으로 히스테리를 가장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보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최후의 유언장을 작성한 것은
1910년 7월 그와 같은 시기였었다.
그의 순진함과 현명함은 소냐의 마음속에 메아리쳤다. 그녀는 그 논문을
옮겨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혼의 접근에는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었고 또 소냐의 생각과
행동에 별다른 변화를 끼치지는 못했으나 톨스토이의 주위(主義)를
부정하거나 인격을 경시하는 일을 없었다. 톨스토이는 완전한 일치를
마음속 깊이 원하고 있었다. 그는 소냐 에게 손을 내밀어 자기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해주도록 그녀의 혼을 높여주고 싶다고 갈망하기도
하였다. 그의 마음 속의 모든 사랑을 소냐 에게 바치려 했었던 것이다.
1891년 소냐 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얼마 전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 때의 그처럼 기뻤던 인상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소.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심정이
된다오. .....당신이 강해지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기필고 나의 사랑은 있는 것이며, 존재할 수
있는 한의 사랑은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해 주오. 나는 끝없이 당신을
생각하고서는 가엾게만 된다오.」
소냐는 한때 그만 두었던 필사(筆寫)를 다시 생각했다. 톨스토이는
소냐 에게 복사해 주기를 부탁했고 그녀의 솜씨를 끝없이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 무렵 톨스토이는 자녀들에게도 어렴풋한 공감과 이해의
징조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또한 그의
사상 가운데 두 가지가 실현된 것도 기쁨이었다. 즉 모든 소유물을
버렸으며 문학 작품의 제작과 포기에 대해 아내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작권에 대한 제한은 약간 있었다. 그로서도 아내와
가족을 무일푼으로 내어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1880년 이전의 작품에
대해서는 소냐를 위해 자작권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제 2의 정신적 탄생
이전에 출판된 것들이었다. 그 이후는 자기가 쓴 것을 더이상 판매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사상이나 감성(感性)을 그린 방법으로 매매한다는
것은 자기의 몸을 파는 것과 같이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소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동의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넋 속에는 가령 그녀에 대해 사랑 때문일지라도 양보해서는 안될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의식이 요구하는 것은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었다. 같은 해 그는 지주의 지위에서 해방되었다. 톨스토이의 꿈은
재산을 분배한 다음 그 가족이 농부 생활을 하는 것이었으나 소냐의
동의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언가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 재산을 아내에게 위탁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소냐는 찬성하지 않았다. 「무어라고요? 당신은 소유권을 악이라고
생각하시면서 그 악을 나에게 떠맡길 작정입니까?」라고 항변했다. 결국
재산은 그를 사망한 것으로 가정하고 상속권을 가진 자가 유산을 상속하고
분할하기로 하였다. 부동산이 사정(査定)되었고 소냐와 자녀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재산이 각각 분배되었다.
그후 톨스토이는 사랑하는 민중에게 둘러싸여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노동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생활과
자기가 실천에 옮기고 있는 사상에 자녀들이 공명하고 있음을 기뻐하고
행복해했다.
그는 겨울이 되면 서재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그의 생활에
깊숙이 젖어든 사람은 비류우코프, 콜보노프, 첼로코프, 승려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슈밋트였으며 그의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1895년 3월, 가장 많은 애정을 쏟고 있던 막내 아이의 죽음으로
톨스토이와 소냐는 자신들의 죽음보다 더 슬퍼하며 괴로워했다. 특히
소냐의 절망은 아주 심해서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광신적인
시기도 있었으나 거의 매일 기도와 교회 다니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이때 그는 지금까지 없었던 동정심을 소냐 에게 보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강인한 성격과 그의 어깨에 걸려있는 사명이 그러한 것을
계속하게 하지 않았다. 내면적인 노고, 자신과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현실 생활에 있어서의 사건에 의해 그 노력이 둔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아내가 쇠약해지고 불행해감에 따라 집을
나가겠다는 꿈은 실현될 수가 없었다. 그는 소냐가 말한 대로 아내의
혼의 비호자였다. 그러나 소냐는 그 보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생활을 바꾸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많은 친구들이 신념을 갖고
살게 하기 위해서 그는 가족과 헤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저서를 통해 그의 방식으로 그의 생활을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톨스토이의 하녀가 테이블 위에 은식기를 나열하고 흰 장갑을 끼고
시중드는 그의 생활을 보고 또 테니스에 흥겨워하는 모습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하고서는 실망과 고뇌의 빛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환멸을 글로 써보내 언행불일치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난을 하는 사람이 참된 벗이라고 생각하고
그들 이상으로 준엄하게 자기를 비판하고 나서 회답을 썼다. 만일 자신과
비슷한 생활을 하며 자기의 주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라고 부를 것이다라며 그는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되풀이하며 그렇게 말하였고 자기 몸에 내리는 서릿발같은 비판에
얼어붙은 듯 그는 자기 생활을 심각히 반성하였다.
1897년 6월 8일 그는 부인에게 자기의 가출 이유를 분명히 적긴
하였지만 그의 가출은 그후 13년 후에 이루어졌다.
1908년의 일기를 보면
「괴롭다. 비통하다. 최근 끊임없이 열이 난다. 이럭저럭 참고는
있으나 아마 죽게 될 것 같다. 확실히 사치라는 어리석은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괴롭다. 그 속에서 나는 인생을 살아왔는데 또 거기서
죽게 된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괴로워진다.」
「.....지금까지도 여전한 괴로움의 계속이다. 야스나야 폴리야나에서
생활은 온통 독(毒)에 젖어 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것은 수치와
고통뿐.」
「내 마음 속에서 고통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한다. 주위의 지나친
빈곤과 비참에 비해 이 무분별한 사치라고 하는 기만(欺瞞), 모든 것이
지독하게 될 뿐이다. 괴로워질 따름이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알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
그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무언가 뜻밖에 찾아와
이 모순에 찬, 용서받을 수 없는 생활에서 자기를 구해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불의의 사건은 무엇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갈 뿐이었다. 아내는 승리를
의식하고 마음놓고 뜻대로의 생활을 밀고 나가 남편의 의식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소냐는 자식의 죽음으로 커다란 슬픔을 맛본 뒤 도처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했지만 불안한 마음의 병적인 흥분을 안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점점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
착란은 그러한 에고이즘의 모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언제나 자기의 모든 것은 남편에게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더우기
결코 그 되돌아보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병적인 옹고집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무어라고 말했을까, 또 앞으로는
무어라고들 말할 것인가, 크산칫베(소크라테스의 아내, 악처로
유명)라고는 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불안에 집착된 소냐는 톨스토이가
매일 쓰던 기록을 모두 보여달라고 요구하였다. 미래에, 자신에 관한
나쁜 인상을 줄만한 대목을 모두 삭제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또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일이 됐건 그녀를
비난하거나 비평하려고는 생각지도 않은 사람에게까지 자기 변호를 하며
남편을 따르지 않았던 이유를 끈덕지게 지껄였으며, 길을 잘못든 것은
남편 쪽이라고 그 증거를 들이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은 그런 행위를
이르게 한 자기의 모든 시도가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정서(淨書)로 남편을 돕던 일도 거부하였다.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되자 갑자기 그녀는 자기가 따돌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자기에게 도움을 받을 여지도 주지 않고 바로 옆에서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을 말없이 곁눈질로 보면서 화를 냈다.
이렇게 되자 모든 사람들은 숨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라와
톨스토이의 비서는 타이프를 치다가도 그 방 앞을 소냐가 지날 때면 손을
멈추었고 복사 중인 원고를 숨기기도 하였다. 소냐의 날카로운 눈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분격하여 심한 발작이 계속 일어나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로서는 이러한 상태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거듭되는 불면증으로 고민하게 되었고 이제까지 참아온
정신적 고통이 육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고뇌를
인생의 과오에 대한 응보로서 달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것을 거기서 찾아내려 한 것이다. 1910년 6월 16일 일기에
「벌이 이처럼 가벼운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썼다. 그는 아내가 병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코비키 박사를
포함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소냐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정신은
정상인데 목적을 달성하려는 방법으로 히스테리를 가장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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