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프 톨스토이

학자의 미망(迷妄)

별관신사 2014. 2. 18. 04:43

그보다 놀라운 일이 있다. 이들 위대한 인류의 지식자들이 가르침이
모두 그 위대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매우 놀라게 했기 때문에 서툰
자들은 선현들에게 거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성질을 주어 그

교조(敎租)들을 반쯤 신으로 모셔버렸다는 사실이다. 교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주된 징조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학자들은 이러한 교의를
불합리성과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증명해 주는 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콩트 그 밖의 사람들의 대수롭지
못한 교의가 그들의 소수 독자 혹은 숭배자들의 재산으로 항상 남기도
했으며, 오늘날도 남아 있을 따름이고, 그 근본이 그릇되었으므로 여태껏

한번도 대중에게 작용할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미신적인 변형이나 군살이
붙여지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대수롭지 못하다는 이 징조가
도리어 진실성의 반증으로서 승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문이나,

석가나, 조로아스터나, 노자나, 공자나, 이사야나, 예수의 교의는 그저
이들 교의가 대중의 삶에 하나의 큰 전환을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서
미신이며 미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신은 상당히 이그러진 상태에 있어서까지도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으므로, 수십억의
사람들은 그러한 미신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생활해 왔으며, 오늘날도 역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교의는 모든 시대에서 뛰어난 사람들의 사상과
어떤 연계(連繫)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그 근저(根抵)로서 쓰이고 있으나,
학자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이론은 그저 그들 자신 사이에서 주고받아질

뿐이고, 항상 반박되고 때로는 10 년도 채 못가서 진실이 나타나면 어느덧
잊어버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금도 그들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다.

현대 사회가 추종하고 있는 이 그릇된 지식의 방향은 자고로 그것에
의해서 인류가 살았으며, 또 교육되었고, 현재에도 역시 살고, 또
교육되고 있는 이들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의 가르침이,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보는 것만큼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곤 없다.
갖가지 연감(年鑑)의 통계란 속에는 현재 지구상의 주민들이 신봉하는
종교는 천 가지나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들 종교 중에는 물론 불교

바라문교 유교 노자교 기독교도 들이 있을 것이다. 천 가지 종교,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아주 정직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무의미한 것들 뿐이다. 그것을 연구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더구나

현대인들은 스펜서나 헬름홀츠나 그 밖의 식자(識者)들이 말하는 최근의
금언(金言)을 알지 못하면 치욕이라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바라문 석가
공자 노자 에픽테토스 이사야에 대해서는 간혹 이름 정도나 알고 있는

일이 있고, 때로는 이름조차 모르는 일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오늘날
행세하고 있는 종교는 결코 천 가지가 아니라 그저 세 가지, 즉 중국,
인도, 헤브류 예수교에 (마호멧트교를 포함한다)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들 종교의 서적은 5 루블쯤 내면 살 수 있고, 2 주일 정도면 통독할
수 있다는 것 및 그것에 의해서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왔으며, 오늘날도
역시 살고 있는 이들 서적 속에서 보면, 우리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1

천분의 7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인류의 모든 지혜, 인류를 오늘날과 같이
만들게 한 일체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일 따위는 그들이 털끝만치도
생각조차 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이러한 교의를 알지 못할 뿐더러 학자도 자기의
전문이 아닌 한 그것을 모르고 직업적 철학자들은 그러한 서적을 가까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거늘 첫째로, 무엇 때문에 이성이 있는 인간에 의하여 의식된
인생의 모순을 해결해서 사람들이 참된 행복과 생활을 결정해준 그들을
연구하는 것인가? 학자들은 합리적 생활의 근원이 되는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한 채 대담하게도 자기네들에게 그것을 보이지 않는 이상 어떠한 모순도
있을 리 없다고 하며, 인간의 생활이란 인간의 동물적 생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들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보이는 자는 자기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또 결정한다.
장님은 자기 앞을 지팡이로 더듬어서 지팡이의 촉감이 가리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단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