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

혼성서술 속의 타자

별관신사 2014. 7. 6. 05:07

토니 모리슨과 J.M. 꾸찌에 소설 속의 타자 분석
어떤 식으로 써야 독자를 움직이고 감동을 주어 자신의 뜻을 심을 것인가. 미학이란 이
런 개인의 소망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창조자의 유한한 생명을 넘어 시간을 거

슬러 살아남아야 하기에 될수록 많은 사람을 움직여야 한다. 그는 한 시대의 요구가 무엇이
고 그것을 넘어서 인간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보편적 인간의 요구와 한 시대
의 특정한 요구, 그리고 그런 것에 걸맞는 개인의 독창적인 방식, 이런 것들 사이에서 늘 헤
매고 고뇌하는 게 예술가가 아닐까.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시대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통찰하여 기존의 정설을 의심하고, 그것
에 도전하는 새로움을 주장이 아닌 느낌으로 표현한다. 미학은 느끼게 만드는 것. 그래서 소
설은 감동 속에 한 시대의 사상을 담은 서술전략 혹은 기법으로 시대의 압도적인 문화양식

과 함께 변모한다. 19세기 실증주의 시대에는 사실주의 양식이, 20세기 전반부 모던시대에는
모더니즘 예술이, 그리고 20세기 후반부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포스트모던 양식이 존재한다.
소설은 늘 인간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시대의 문제점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

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실증주의 시대의 옷은 어떤 색깔과 무늬였던가. 저자가 자신의 서술에 의심을 품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그릴 수 있던 시대의 옷은 실물에 알맞게 지어져서 이질감을 느낄 수 없는

옷이다. 저자는 신처럼 인물들의 마음속을 들락거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요약을 서슴지 않는
다. 시작과 중간과 절정과 해결이 산뜻하게 내려진다. 많은 인물들을 원근감 있게 배치한다.
주인공은 선악의 갈등을 표출하는 입체적 인물(round character)로 전면에 확대시키고 주

변인물은 선악의 단편만을 표출하는 평면적 인물(flat character)로 멀리 배치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추정해내던 시대에는 소설가가 객관 현실(혹은 실재)을 그
릴 수 있다 는 믿음이 있었다.

산업혁명은 물자의 혜택을 귀족이 아닌 평민들도 고루 누리게 하자는 선의에서 이루어지
지만 봉건시대 농경사회가 지닌 인간과 사회의 유기적 끈을 파괴시키는 어둠도 낳는다. 민
주화와 함께 산업사회는 가치의 기준이 절대자로부터 개인에게로 옮아가야 했고 이런 과도

기에 사람들은 심한 소외를 겪는다. 절대기준에 대한 회의. 더 이상 그것이 통하지 않는 사
회에서 그것이 있는 것처럼 믿을 때 나타나는 폭력과 괴리.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사상과 예술의 특징은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의심이었다. 신이 사

라진 시대의 예술은 소설에서 저자의 위치가 감소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 그는 인물을
위에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인물의 뒤로 사라진다.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그
대로 노출시키는 내적 독백이 저자의 서술을 억누른다. 한 사건을 어떻게 인물마다 달리 보

는가 그러므로 여러 인물들의 투명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단면을 합성하여 둥글게 만드는
것은 독자가 할 일이다. 흩어진 독백과 서술 속에서 이야기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찾아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러나 뜻은 좋았으나 그것도 언제까지나 권력을 누릴 수는 없었다. 내적

독백과 흩어진 서술은 난해하여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고급 독자에게만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소설은 역시 읽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사라졌다지만 인물들을 앞세워서 여전히 뒤에서 그의 음성을 보편음성으로

만든다. 이제 더 이상 숨지 말고 당당히 앞에 나와 자신의 음성으로 현실을 그려보라. 그 현
실은 어떤 것인가.
현실이 유동적이고 단 하나의 기준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의 음성이 신의 음

성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모더니즘은 우주의 질서, 신화, 보편가치를 내세웠다. 그런데 시간
이 흐르자 그것은 절대논리가 되어 중심으로 고착된다. 중심, 기준, 절대논리가 허위임을 드
러내고 지금껏 중심에 의해 밀려났던 주변, 즉 타자를 복원시키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단 하

나의 재현이 중심주의의 허구임을 보여주는 예술양식이다. 객관재현이 숨긴 타자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인물의 내적 독백에서 다시 저자의 서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전
보다 더 강력한 서술로 돌아가면서 지극히 역설적으로 그것이 현실(혹은 실재)을 객관적으

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음성임을 암시한다. 자신의 욕망과 입장에서 나온 자
의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혼성서술'을 낳는다. 삼인칭 전지적 서술이 되돌아
와서 이번에는 인물마다 각각의 입장에 서 서술을 한다. 그런데 그 저자는 옛날과 같은 신

이 아니고 한낱 서술자로서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 삼인칭 객관서술과 일인칭 제한서술
이 한곳에 있다. 예전의 어떤 시대에도 그리 흔치 않던 삼인칭과 일인칭의 혼합양식이 포스
트모던시대에 압도적으로 출현한다. 그리고 최근의 탈식민주의 작품에서 이 혼성서술은 좀

더 확장된다. 중심에 의해 억압되어온 타자를 복원시키는 이 시대 혼성서술을 살펴보자.
이 글은 혼성서술 속의 타자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에서 혼
성서술은 각기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탈식민주의 소설인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과

J.M.꾸찌에의 '마이클 K의 삶과 시대'를 통해, 타자를 복원시키는 방식은 쓰는 이의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다른가, 삼인칭과 일인칭의 혼합양상을 살핀다. 모리슨은 미국의 흑인 여성이고
꾸찌에는 남아프리카의 백인 남성작가이다. 전자는 주변인이고 후자는 중심인이다. 프로이트

의 무의식, 데리다의 타자, 라캉의 타자, 그리고 포스트모던 소설과 탈식민주와 소설의 타자
를 살펴보면 한 시대의사상과 예술의 양식이 같은 이념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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