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으로서의 신학에 대하여는 온건하게 존경의 입장을 취하는게 좋다.
신학도 다른 과학과 동등하게 가치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당신의 내적 생활에 있어서 신학의 지식은 필요치 않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고 계시다.
요한복음 3:3-12, 누가복음 10:21-23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부터 선교사나 여집사, 자비의 벗회의 수녀에 이르기까지,
무릇 성직에 있는 사람들을 평가할 경우, 우리들 평신도에게 있어서 주로 기준이
되는 것은, 그들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종교적 능력 중 어떤 것을 갖추고 있느냐
아니냐이다. 즉 위안의 힘, 효력 있는 기도(요한복음 15:7), 병의
치료(마가복음 3:15-18), 죄를 사함, 예언의 능력, 좀더 정확히 말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다시 말하면, 진리의 성령을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상의 능력들 중 적어도 몇 가지를 갖추고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
그러한 성직자의 어떤 가르침도 신뢰해서는 안된다.
그밖의 모든 것들, 이를테면 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교회에 대한 열성,
설교의 재능, 그밖의 어떤 것도 다만 2차적인 것에 불과하며, 때로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능력을 받는 데에 방해가 되는 수조차 있다. 위에서 말한
모든 능력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어떤 성직 수여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의 직접적인 허락에 의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또 어떤 교단에 있어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능력이 성직자들에게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성직자 계급 자체의 책임이다. 그들은 때로 인류에 대한 의의와 감화력을
상실하는 수도 있는데, 그 진짜 이유는 이와 같은 능력을 결여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이러한 일들을 오늘날에도 성직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을 자신에게
맡겨진 신의 말씀을, 그저 직업적으로, 아니면 정치적으로, 또는 교회의 목적을
위해 선전할 뿐이지, 그들에게 지워진 사명감으로 설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 직접적인 결과는 그들 자신의 영적 생활의 파멸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또 어느 민족에나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소망도 갖지 않고, 오로지 바른 길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야말로 진짜 성직자이다. 만일
성직자이면서 이와 같은 특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거의 값어치가 없다. 당신이
자기를 그와 같은 진실한 성직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을
왕관과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머리에 쓸 때만, 왕관도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
신학도 다른 과학과 동등하게 가치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당신의 내적 생활에 있어서 신학의 지식은 필요치 않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고 계시다.
요한복음 3:3-12, 누가복음 10:21-23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부터 선교사나 여집사, 자비의 벗회의 수녀에 이르기까지,
무릇 성직에 있는 사람들을 평가할 경우, 우리들 평신도에게 있어서 주로 기준이
되는 것은, 그들이 다음과 같은 위대한 종교적 능력 중 어떤 것을 갖추고 있느냐
아니냐이다. 즉 위안의 힘, 효력 있는 기도(요한복음 15:7), 병의
치료(마가복음 3:15-18), 죄를 사함, 예언의 능력, 좀더 정확히 말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 다시 말하면, 진리의 성령을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상의 능력들 중 적어도 몇 가지를 갖추고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
그러한 성직자의 어떤 가르침도 신뢰해서는 안된다.
그밖의 모든 것들, 이를테면 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교회에 대한 열성,
설교의 재능, 그밖의 어떤 것도 다만 2차적인 것에 불과하며, 때로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능력을 받는 데에 방해가 되는 수조차 있다. 위에서 말한
모든 능력은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어떤 성직 수여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신의 직접적인 허락에 의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또 어떤 교단에 있어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능력이 성직자들에게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성직자 계급 자체의 책임이다. 그들은 때로 인류에 대한 의의와 감화력을
상실하는 수도 있는데, 그 진짜 이유는 이와 같은 능력을 결여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이러한 일들을 오늘날에도 성직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을 자신에게
맡겨진 신의 말씀을, 그저 직업적으로, 아니면 정치적으로, 또는 교회의 목적을
위해 선전할 뿐이지, 그들에게 지워진 사명감으로 설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 직접적인 결과는 그들 자신의 영적 생활의 파멸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또 어느 민족에나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소망도 갖지 않고, 오로지 바른 길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야말로 진짜 성직자이다. 만일
성직자이면서 이와 같은 특질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거의 값어치가 없다. 당신이
자기를 그와 같은 진실한 성직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을
왕관과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머리에 쓸 때만, 왕관도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