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
1. 티벳의 역사
별관신사
2013. 5. 27. 09:04
1. 티벳의 역사
티벳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뵈Bo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카와잔 뵈Khawajen Bo라고
한다. "눈 덮인 땅"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역사 기록은 2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제국,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중국의 周 왕조 말기와 비슷한 시기
이다. 티벳 역사 초기 8세기 동안은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왕조가 통치했다. 종교적으
로는 무당들이 주도하는 占, 마술, 희생 제사가 널리 행해지는 精靈信仰(애니미즘)의 시
대였다. 정치적 세력은 王家에 집중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王族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
람들이라고 믿었다. 첫 번째 7명의 왕은 허공에 걸린 마법의 사다리를 타고 그 땅을 다
스리기 위해 내려 왔으며, 죽을 때가 되면 다시 그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
러나 궁정 내부에 모종의 갈등이 생기자, 8번째 왕이 사다리가 매달린 밧줄을 끊어 버
렸다. 그때부터 티벳 왕들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아내와 부장물과 함께 거대한 무덤
속에 묻혔다.
초기 왕조는 동쪽에서 오늘날의 쩨땅 근처인 짱추 방면으로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얄룽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주변 종족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군사력을 기반으로 봉건제도가 확립되었다. 티벳 왕조에 병합된 각
종족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고, 언어와 종교적인 경향도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융합되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넓이 약 100만 평방 마일, 평균 높이 약 4000미터
에 달하는 티벳 고원이었다. 그렇게 높은 지역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신체적으로도
타고나야 한다. 그곳 토박이의 후손으로 태어나기 전에는 적응하기가 힘들다. 티벳 말
은 그 주변 국가인 고원 아래의 몽골, 인도, 중국, 터키 어 등과 상당히 다른 티벳-버마
語族에 속한다. 고대의 티벳 사람들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현상, 특히 산과 하늘을 신성
하게 여겼다. 그래서 땅 아래, 땅 위, 그리고 하늘에 있는 수많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드리고 점을 치는 종교 행위가 성행했다.
고원 산악 지대의 문화는 평지의 문화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영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고원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수명이 짧다. 그리고 장관을 이루고 있는 주변 산
들은 자연스럽게 명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영적인 분위기를 실
제 생활에 연결시켰다. 대부분의 샤머니즘이 그러하듯이, 고대 티벳의 샤머니즘도 현실
적인 성공, 전쟁에서의 승리, 건강, 부, 자손의 번창 등을 구했다. 특히 군사력을 바탕으
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던 시기에는, 용한 무당이 왕권 수호를 비는 굿판을 벌이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었다. 그에게는 절대 권력이 주어졌다. 무당
은 하늘에서 왕의 후손이 내려오기를 기원하는 굿이나, 왕이 내려온 것을 축하하고 왕
국의 안녕을 위해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신들의 도움을 청하는 굿을 주도했다.
옛 왕이 물러간 다음 새 왕을 등극시키는 것도 무당의 일이었다. 왕권이 바뀌는 공백
기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서 자문을 받아 오기도
했다. 무당은 죽은 자들 세계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그 혼돈의 힘이 산 자들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도 했다.
티벳 왕조 문화는 여러 세기 동안 번성했다. 낮은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들은 높은
고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티벳을,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침공할 수가 없었다. 그래
서 고대 티벳 문화는 외부의 간섭 없이 발전할 수 있었다. 티벳 종족들 간의 영토 분쟁
은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A.D. 6세기에는 고원 지대 전체가 하나의 제
국으로 통일되었다. 통일로 인해 강력해진 티벳 제국은 고원 아래 지역을 사방으로 점
령해 나갔다. 그리하여 중국, 몽골, 터키, 인도 등에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군사적인 대제국 건설은 7세기 초, 송쩨 감뽀 황제 시대에 마무리되었다. 무력을 기
반으로 한 통일 제국은 그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티벳 사람들은 고원 아래
평지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송쩨 감뽀는 윤리와
도덕에 토대를 둔, 보다 평화적이고 영적인 방향으로 티벳 문화의 흐름을 바꾸기 시작
했다. 그는 인도의 팔라 왕조와 후-굽타 왕조, 실크로드 주변에 산재한 중앙 아시아의
여러 도시국가, 그리고 중국 唐나라의 정신적인 등뼈가 된 대승불교를 받아 들여 티벳
문화를 체계적으로 개혁해 나가기 시작했다.
송쩨 감뽀는 학자들을 인도로 보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게 했다. 그런 다음 산스크
리트어를 기반으로 티벳 문자를 만들어, 여러 가지 불교 문헌을 티벳어로 번역하기 시
작했다. 그는 주변 아홉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그 중에는 네팔과 唐나라
의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해 수많은 불경과 불교 예술품을 티벳으로 끌
어 들였다. 또한 새로운 도읍지 랏사에 조캉과 라모체라는 왕궁 사원을 건립하여, 온
나라의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다.
이후 약 250년 동안, 티벳의 왕들을 송쩨 감뽀의 뒤를 이어 문화적인 개혁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경전 번역, 연구 기관 설립, 사원 건축, 교육 사업 전개 등이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이 문화적인 개혁은 치송 데쩨 시대인 790년대에 절정에 달했
다. 치송 데쩨 황제는 인도에서 온 성자 파드마 삼바바와 철학자 샨타라크쉬타의 도움
을 받아 삼예에 티벳 불교 최초의 僧院을 세웠다. 샨타라크쉬타가 그 승원의 승원장이
되었다. 이때 인도의 불교 대학 제도와 커리큘럼이 함께 소개되었다. 치송 데쩨은 또한
아시아 전역에서 다방면의 학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학술 도입 사업은 이후 60년
동안 계속되었다. 불교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수학, 약물학, 시, 예술, 정치학, 조각 등
다방면의 학문이 이때 발전했다. 페르시아, 인도, 위굴, 몽골, 중국의 唐나라, 그리고 실
크로드 주변의 여러 도시국가에서 학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가르침을 비교하고 조화
시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티벳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갖기에 이르
렀다. 한 가지 예로, 830년 대에는 세계 각처에서 수백 명을 학자를 초청한 다음 그들에
게 10년 동안 인도, 중국, 페르시아, 몽골, 위굴의 의학 체계를 비교하고 연구하도록 했
다. 그 결과로 건강에 관련된 불교의 영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심리학, 해부학, 신경생리
학, 외과 의학, 식물학, 화학, 영양학 등이 종합된 티벳 특유의 의학 체계가 성립되었다.
삼예가 종교적인 중심지가 된 이후, 치송 데쩨의 후계자들은 삶 전체를 불교화 할
것을 강요했다. 강요의 도가 지나쳤던 까닭에 王家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
이 거듭되었다. 암살과 반란이 계속되면서 통일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는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불교 탄압도 있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불교의 가르침과 제도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지방 귀족들의 보호 아래 백성
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3세기 동안, 백성들은 점점 더 깊이
불교에 빠져들었다. 불교적인 교육 제도가 재확립되고, 전국 방방곡곡에 승원이 세워졌
다. 방대한 불경 번역 작업도 이 시기에 완료되었고, 티벳 고유의 불교 문헌들도 엄청
난 양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로는 티벳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통일 왕조가 다시는 나타
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 패권주의가 나타날 가능성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백
성들의 마음 속에 불교의 비폭력에 대한 가르침이 깊이 뿌리 내렸기 때문이다. 지방의
귀족들이 자기 지역을 다스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급속히 확장하던 승원 세력에 사
회적.정치적 관할권을 점점 더 많이 넘겨주게 되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일대를 통일했다. 그때 티벳도 대몽골 제
국의 관할권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티벳 사람들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티벳은
이미 13개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지방 귀족과 승원이 협력하여 다스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티벳 불교의 사키야 파와 콘 가문에게 티
벳의 통치권을 주었다. 그러나 사키야 파는 정치적인 세력보다는 영적인 지도력을 발
휘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다. 14세기가 끝나 갈 즈음, 몽골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토착 팍모드루 왕조가 일어나 티벳 통치를 자임했다. 쯔옹 까빠가 주도한 종교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 즈음이다.
쯔옹 까빠는 1409년 수도 랏사에서 범민족적인 불교 축제를 열어, 민족 전체가 불
교 수행에 헌신하는 새 시대의 막을 열었다. 쯔옹 까빠는 그 축제에서 붓다의 영원한
현존에 대한 민족적인 깨달음을 상징하는 행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보 린포체(아띠
샤)의 불상을 조캉 사원에 봉안했다.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온 백성이 모여 2주 동
안 종교적인 축제를 벌이는 전통은 그 때부터 생긴 것이다. 축제 기간 동안에는 일상적
인 모든 일이 중지되고, 승원장들이 시민의 모든 일을 책임진다. 이 축제는 1960년 티
벳 정부가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티벳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연중 행사로 치러졌다.
쯔옹 까빠가 불어 일으킨 개혁의 바람은 15세기와 16세기에 이르러 꽃이 피었다.
티벳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현실적인 삶 전체가 변화되었다. 각 지역에서 승원의 영향
력이 커졌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깨달음의 길에 들어서는 남녀 구도자들이 날이 갈
수록 늘어났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점점 더 평화로운 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군인이
점점 줄어들어 지방 귀족을 호위하는 몇 사람 정도만 남게 되었다. 쯔옹 까빠가 창시한
겔룩파는 젊은 제자 겐둔 드룹빠(제 1대 달라이 라마)가 이끌어 나갔다.
겐둔 드룹빠는 오랜 세월 동안 영감이 넘치는 가르침을 베풀고 글도 많이 남겼다.
여기저기 사원도 많이 건립했다. 그가 죽은 다음, 태어나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자기가 겐둔 드룹빠라고 자칭하는 어린 아이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겐둔 드룹빠가 살
던 동네와는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여러 가지 시험을 거치고 상서로운 징조들을
종합한 결과 위대한 스승 겐둔 드룹빠의 還生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충분한 교육을 받
은 다음, 겐둔 갓초(제 2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으로 겔룩파를 이끄는 영적인 스승이
되었다. 그의 다음 번 還生도 비슷한 시험과 징조를 통해 승인 받아, 소남 갓초(제 3대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을 갖고 16세기 어간에 겔룩파를 이끌었다.
1573년 소남 갓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몽골 황제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
'(바다와 같은 스승)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헌사 했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이렇게
소남 갓초가 처음 들은 것이지만, 티벳 사람들은 그를 그의 앞선 두 前生의 뒤를 이은
제 3대 달라이 라마로 여긴다.
소남 갓초와 그의 뒤를 이은 제 4대 달라이 라마 욘뗀 갓초 시대에, 세속의 통치자
들은 지속적으로 확산되던 종교 부흥 운동을 못마땅히 여겼다. 너나 할 것 없이 승려가
되려고 나섰고,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사원을 건립하고 유지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라 전체가 흔들
리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티벳은 동시대의 북유럽이나 중국 또는 일본처럼 군
부 독재자가 나타나 종교 중심의 삶을 산산 조각내 버리느냐, 아니면 세속의 지도자들
이 무기를 내려놓고 영적인 진화의 길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조캉 대승원이 건립된 지 거의 천 년이 지난 1642년, 제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갓초
(1617-1682)는 간덴 宮을 건립하고 티벳의 왕으로 즉위했다. 티벳 사람들은 그 이후 오
늘날까지, 僧王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는 간덴 정부를 합법적인 정부로 여긴다. 티벳 사
람들이 '위대한 5대'라고 부르는 이 첫 번째 僧王은, 티벳의 사회적 특성에 적합한 독특
한 정치 제도를 만들었다. 그는 승원과 비폭력이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체
제를 구축했으며, 사실상 귀족 집단을 없애 버렸다. 그들이 세습적으로 물려 오던 토지
를 몰수하고, 간덴 정부 아래서 일한 만큼 받는 보수로 살아가게 했다. 귀족들은 더 이
상 私兵을 거느릴 수가 없었다. 봉건 영주로써 소작 농민들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흔들
던 그 당당하던 세력도 완전히 날개가 꺾였다. 당시 티벳의 소작 농민들은 중세 유럽이
나 러시아의 농노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티벳은 만주(淸나라)가 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覇者로 등장했을 때, 그들과 우호 관
계를 맺어 국가적인 독립과 동질성 유지를 보장받았다. 1644년, 한반도 북쪽 산악 지대
에서 발원한 퉁구스 족(淸나라)이 明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 중국 내지로 진출한 다음,
주변 다른 나라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그때 淸나라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떠오른 존재
는 몽골이었는데, 달라이 라마는 몽골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몽골에서 권위 있는 존
재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淸나라 황제의 눈에는 티벳이 도움이 될 만한 동맹 상대국으
로 보였다. 그래서 1651년 淸나라 황제 順治帝(世祖)는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와 동
맹을 맺고 티벳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었다.
淸나라는 달라이 라마의 티벳 통치권을 인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알고
있던 온 세상의 영적이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달라이 라마는 淸나라 황제를 만주와 중
국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해 주었다. 또 불교의 진리와 수행자와 사원을 보호해 주는
국제적인 수호자로 여겼다.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불교를 육성시켜 불교 사회로 만들
고, 淸나라 황제는 무장을 해제한 불교 사회를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약속이 티벳과
淸이 맺은 동맹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티벳이 거칠기로 소문난 무력 국가인 몽골을
평화스러운 나라로 만든 것은 주목할 만한 사회 변혁의 한 예이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
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그러나 천 년 동안 티벳 스스로가 경험한 변화에 비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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