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눈.

3. 티벳의 곤경

별관신사 2013. 5. 27. 09:06

물질적인 진보에 대해 거부감이 있긴 했지만, 현대로 들어오면서 티벳은 어느 정도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티벳 사회는 내적인 발전에 대한 개인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티벳 자
체로서는 큰 문제가 없었고, 내부적인 갈등이나 외부와의 전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아직 완전한 붓다의 땅은 아니었다. 현대적인 정치 지리학 입장
에서 보면, 20세기 상황에서 티벳은 매우 상처받기 쉬운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비무장 상태로 오랜 세월을 지냈
기 때문에 갑자기 밀려 닥치는 영국과 중국의 군대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둘

째는 지리적으로 티벳 자체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고립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세계
정세에 너무 어두웠고, 다른 나라들도 티벳을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티벳이 불교 국이라는 정도였다. 티벳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 나라는 영국과 중국 정
도 였는데, 그나마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은 티벳을 약탈

대상 정도로 여겼다. 영국은 티벳 정부와 통상 협정을 맺으면서 티벳을 독립국으로 대
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국이 티벳을 장악하려고 할 때 그것을 묵인해 주
었다. 결국 영국은 티벳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고 중국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도

와준 셈인데, 그 대가로 무역 거점인 홍콩의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은 자기들이 티벳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티벳 사람들은 중
국과 동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중국 사람들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티벳이 마치 자기들 소유인 양 주인 행세를 했다. 그들은 티벳을 '서

쪽 창고'(西藏)라고 부르며, 옛날부터 자기들 나라의 일부인 것처럼 선전했다. 1949년
모택동 정부는 티벳을 점령한 후, 자기들의 고국인 티벳 지역에 사는 동족을 외국 사람
의 손에서 '해방'시켰다고 세계 앞에 선전했다. (그 당시 티벳에는 유럽 사람 6명이 있
었다.) 그러나 티벳 사람들에게는 중국이 외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해방

'되는 것에 저항했다. 모택동의 붉은 군대는 티벳을 완전히 점령했다. 그러나 티벳 사람
들의 저항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은 붉은 군대의 잔인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는 티벳의 소유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때 100만 명이 넘는 티벳 사람이 죽었으며,
불교 문화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 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
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티벳을 중국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중국 정부는 티벳의 언어와 불교 문화를 탄압
했다. 티벳의 민족적인 동질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파괴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벳 사람을 중국인으로 개조하려는 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
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 14대 달라이 라마는 백성들을 이끌고

티벳을 탈출하여, 인도 정부의 도움을 받아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제 지금 1990년 대
에는, 세계 각국이 티벳을 올바로 이해하고, 600만을 헤아리는 티벳 유랑민의 생존권에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