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가 <자신의 악한 부분은 자기 이름을 부를때마다
기뻐한다>고 말한 것은 지당하다. 비난을 섞어서 부를 때조차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이며, 그 뜻에서 자아를
완전히 버리는 것에 스스로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그에 앞서 인간 본성의 깊은 타락을 경험에 의해서 알고,
또 이것과 딴판인 생존의 실제 가능성이 자기 자신에게 나타나 있는 것을,
역시 어느정도의 경험을 통하여 알아야만 한다.
모든 인간의 운명의 비밀은 같은 성녀 카타리나의 다음의 말에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하고자 하며, 사랑으로써 축복을 받고자 원한다.
조물주도 인간을 그렇게 정하시었다. 인간이 이 사랑의 충돌을 변천해가는
것에 의하여 충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선인 신을 구하려 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을 그와같은 어리석음으로 허무하게 보내고 있다. 그게 아니고 인간은
신에게서만 진정한 사랑과 성스러운 기쁨을 발견하고 완전한 만족이 주어질
터인데도>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큰 고난의 시기가 필요하며, 그것을 견디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욥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42:5)>
폴뤼크라테스의 반지(고대 그리스의 전설. 사모스섬의 왕 폴뤼크라테스는
너무 많은 행복을 얻었으므로 신의 질투를 두려워하고 가장 사랑하는
반지를 바다에 던졌다. 그런데 그 반지가 이상한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
왕의 손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똑같은 제목의 쉴러의 서사시가 있다.)는
심리적으로 아주 정당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야기이다. 물건을 소유하는
만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생각한다면, 가장 사랑하고 있는 것을 버려야만
한다. 그리하면 즉각 그밖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잃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와같은 집착이 재물, 가옥, 장서, 수집품, 회화, 기타의 비싼
물건에 대한 진짜 노예상태로까지 전락하는 수가 있다. 다른점에서는
선량한데, <그 영혼이 먼지에 싸여 있다(시편119:25)> 이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단테는 신곡 연옥편 제19곡에서 법왕 하드리아누스 5세의 모습을 빌어
놀랄만큼 썩 잘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