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힐티)

11월 1일

별관신사 2014. 11. 14. 03:43

죽음에 대한 관념은 젊은이들에게는 대개 두터운 것이지만, 정상 상태에
있고 또 양심의 불안이 이에 가세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서 두려움은 오히려 상실되어 가는 것이다.

그 경우 죽음은 매일 자고 깨는 과정과 별로 본질적인 차이가 없는 하나의
커다란 과도적 동작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보고를 하나도 갖지 못하지만, 그것은 잠드는 과정을 아무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근대의 유명한
작가(톨스토이)는 죽음이 다가올 때의 실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이나 삶에 관련해서 지니고 있던 관념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죽음은
내게서 두려움을 잃었고, 나는 죽음이 삶의 에피소드의 하나이며, 삶은 죽음에
의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기쁨으로서 기다리고 바란다는 경지에

이르렀다. 저승에서 계속될 생명의 확신은 내안에서 확고해졌으므로 모든
의혹은 힘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왕왕 갓난아기의 고고의 소리와도 같은
환희의 외침이 내 가슴으로부터 우렁차게 튀어나올 것만 같이 되었다.

그지없는 행복감이 내 영혼을 채우고, 나는 좋은 친구를 기다리듯 죽음을
기다리고 바랐다.>
큰 실패를 저질렀을 때나 풀기 힘든 분규에 말려들었을 때에는 왕왕

신이 내리시는 죽음이 분명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하고 또 가능한
타개책이며, 많은 증오가 분노를 달랠수 있는 조정자이다. 반대로 스스로
<죽고싶어함>은 인생의 어려움을 피하려고 하는 불성실한 수단이다.

그것은 서투르고 부정한 도박자가 트럼프의 카아드나 체스의 말을 휘저어
섞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가 이 인생에 부름을 받은 것은 거기에 흥미가
없다고 해서 멋대로 이 인생으로부터 떠나가도 좋기 위해서는 아니며,

오히려 신이 적당한 때에 우리를 불러들일 때까지 자기나 남에게 있어서
유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이다.
욥기 5:17-26.

게다가 아마도 인생은 결코 제멋대로인 죽음에 의해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니며, 그 뒤에 아마도 다른 훨씬 곤란한 생활이 계속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 인생을 멋대로 단절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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